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안국역 인근 도로에 모인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부둥켜안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해 12월3일에 일어난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122일 만에 헌법이 윤석열의 대통령직을 파면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전 국민이 목격자가 된 현행범은 자신의 범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나라를 극도의 내분 상태로 처박기까지 했다. 심지어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쿠데타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파렴치도 보여줬다. 박정희도 자신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불렀으니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아니, 민주주의는 안심하고 나태해지는 순간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윤석열‘들’의 쿠데타가 새삼 보여주었다. 사실 윤석열의 등장과 대통령 당선 자체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결함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검사 윤석열에게 대부분 속았으며, 그것을 알고도 그의 당선을 거든 이도 적잖았다. 내 주위에서는 윤석열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무조건 낙선한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들은 우리의 민주주의 상태나 주권자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딱 한 가지를 그들에게 되물었다. 이명박이 만든 언론 지형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하지 않았는가?
‘다른 윤석열’ 또 등장할 수 있어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윤석열의 “위헌, 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했다. 어쨌든 현행 헌법은 분명하게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과 뜻을 먼저 헤아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늦어지자 사회는 크게 동요하고 온갖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과연 이 현상이 그렇게 이상하고 건강하지 못한 증표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성적인 접근을 주문한 매체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기에는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작용한 것뿐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건대, 저들은 믿기 어려운 이들이라는 기억의 환기가 감정을 크게 흔들었던 게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헌법재판소의 사후 판결이나 윤석열의 탄핵과 파면을 요구하며 벌였던 시위만을 가지고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자신할 수 있을지 조심스러워진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나 진전시키는 문제를 부지불식간에 현실 정치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권의 문제로 국한해서 사고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윤석열’이 또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 정권이 실패할 때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문재인 정권의 실패가 윤석열을 집권시켰다는 진부한 공식에 갇히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상투적인 사고의 맹점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퇴보의 기준이 민주당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 정당으로서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 또 국민의힘의 환골탈태도 중요한 문제인 건 맞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특정 정당의 성패 여부, 특정 정당의 집권 여부로 판가름 난다는 것은 일단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현행 헌법 제1조 2항을 무력화 내지 희화화한다.
도리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왜 민주당 정권은 ‘실패’를 반복하는가? 어쨌든 국내총생산(GDP)은 증가하고 주가는 경향적으로 오르는데 말이다. 왜 국민의힘 정권은 ‘몰락’을 반복하는가? 안보와 미국과의 혈맹을 든든하게 한다는데 말이다. 그리고 왜 대안 정당들은 ‘분열과 자기 배신’을 반복하는가? 민중의 삶은 갈수록 나날이 고단해지고, 기후위기는 이미 들이닥쳤고, 소수자의 권리와 목소리는 여전히 배제되고 있는데 말이다.
달라진 상상력과 언어가 절실하다
만일 우리의 역사적 조건과 민주주의의 결함에 현실 정당들이 오염되어 있다면, ‘더 좋은’ 민주주의와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향한 도정에 있는 어떤 걸림돌을 먼저 제거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합리성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 계산하고, 고소하고, 안 들키게 뒷거래하는 데 동원하는 게 아니다. 사실 이런 합리성의 발현은 경제적 효율성의 필연적 결과이고 경제적 효율성은 사회제도나 문화 자체를 상품 생산과 판매에 적합하게 찍어내며 주권자는 소비자로 타락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대체 무엇인 걸까? 절제를 모르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적으로 너무 깊게 박힌 분단 때문일까? 무엇이 원인이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금 서 있는 자리와 걸어가는 길에 대한 정직한 시선, 그리고 달라진 상상력과 언어일 것이다. 썩은 것들을 갈아엎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황규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