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에서 한 농민들이 화재로 불에 탄 사과를 살펴보고 있다. 안동|권도현 기자
정부가 1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하다. 정부가 시급한 현안을 해결한다며 추경 앞에 ‘신속’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얼어붙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신속히 추진해야 할 사업은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정 부분 해소된 만큼 추경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8일 금융투자업계와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은 경제정책 조합이 보다 부양 기조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자은행 바클리스는 “트럼프 관세에 따른 외부 충격을 감안할 때 정부가 추진하는 10조원의 추경보다 큰 20조~25조원을 예상한다”고 밝혔다. HSBC도 “다가올 추경 규모가 일부 상향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예상보다 미국이 고율의 상호관세(25%)를 부과하면서 경기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추경 규모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전망과 달리 추경 규모를 둘러싸고 여야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면서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경기 대응을 위한 추경엔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역대 재난 추경, 경기 대응 목적 사업도 다수 포함
정부는 이번 추경을 산불 대응에 방점을 두면서 10조원 규모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역대 재난 대응 추경 사례를 보면 경기 대응 목적 성격의 사업도 다수 포함됐다. 2015년에는 메르스 대응(2조5000억원)뿐 아니라 서민생활 안정(1조2000억원)과 생활밀착형 안전 투자 및 지역경제 활성화(1조7000억원)도 담겼다.
2019년 추경 때도 미세먼지 대응(2조2000억원)을 앞세웠지만, 경기 대응(4조5000억원)에 두 배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정부가 편성했던 여덟 차례 추경에서도 방역 지원보다는 소상공인 긴급피해 지원, 지역경제 활성화 등 민생 사업에 방점을 뒀다. 재난 대응과 경기 활성화라는 복합적 목적으로 추경이 활용된 셈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을 산불 대응과 통상 및 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 민생 지원 등으로 한정하면서 규모는 과거 추경보다 쪼그라들었다. 2009년 당시 추경 규모는 정부안 기준 28조9000억원이었는데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2.3%에 달하는 규모였다. 정부 추산 경제성장률 증가 효과는 0.8%포인트에 달했다. 성장률 제고 효과가 0.3%포인트였던 2013년과 2015년 추경도 당시 GDP 대비 규모가 각각 1.2%, 0.9%로 편성됐다.
반면 이번 추경 규모는 정부안대로 통과되더라도 GDP 대비 0.4%에 그친다. 성장률 제고 효과도 0.1%포인트 수준에 불과할 전망이다. 경기 진작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짠물 추경’인 셈이다. 산불 발생 이전에 한국은행은 성장률을 0.2%포인트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15조∼20조원 규모의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고 한 것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특히 추경 시점이 늦어질수록 효과가 반감되는 것을 고려하면 20조원 이상의 추경이 필요한 상황이다.
무산된 ‘벚꽃 추경’···정치권과 정부의 네탓 공방
추경 시점도 늦어졌다. 정부가 1월 말부터 이례적으로 추경을 언급하면서 ‘4월 벚꽃 추경’에 대한 기대감은 커졌다. 지난해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정부안에 대한 감액만 이뤄진 데다 추경을 편성하지 않으면 1%대 중반으로 성장률이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조기 추경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겼다.
그러나 야당의 일방적인 예산 삭감에 따른 책임론을 부각하려는 국민의힘과 ‘이재명표’ 사업을 포함하려는 더불어민주당의 줄다리기로 추경은 동력을 잃었다. 정부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지난달 말 여야 원내대표가 추경안 제출을 정부에 요구했지만, 정부는 여야 간 추경 규모와 방식 등에 대한 합의가 먼저라며 다시 공을 국회로 돌렸다. 정부 부처 관계자는 “예산권을 가진 기재부가 국회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추경 논의가 지지부진해진 사이 주요 전망 기관은 잇달아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올해 2월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각각 성장률 전망치를 1.5%와 1.6%로 낮춘 데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1.5%를 제시했다.
역대 최악으로 번진 영남권 산불 이후 정부는 다시 추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여당은 산불 대응과 같은 시급한 분야에 국한해 소규모로 추경을 편성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야당은 경기 대응 등을 고려해 추경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애초 벚꽃 추경을 기대했지만 대선이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1분기는커녕 2분기에도 집행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1분기에 경기 대응 목적의 추경을 하고, 새 정부 출범 이후에는 역점 사업과 세수 결손을 반영한 2차 추경을 하는 방안이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였다”면서 “추경이 늦어진 데는 정치권 책임도 있지만, 예산 편성권을 가진 정부가 소극적으로 나선 측면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