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2월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8차 변론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정부 3년 간 한국 사회 분열 수위는 수시로 임계치를 넘었다. 국민 통합에 나서야 할 대통령이 이념 전쟁에 불을 붙이고, 세대와 젠더를 가르고, 반대자를 적으로 몰았다. 적대에 기반한 윤 전 대통령의 통치는 12·3 비상계엄에 따른 파면으로 일단락됐다. 깊어진 분열을 치유하는 과정은 이제 시작이다. 전문가들은 시민은 적대적 정치의 극복을 요구하고, 정치권은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시민들은 극단적 분열의 목격자였다. 4개월 간 대규모 탄핵 찬반 시위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분열은 정치권, 종교계, 학계, 문화계, 시민단체 등 전반에서 확인됐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중국 개입설 등 가짜뉴스가 서로에 대한 혐오의 골을 키웠다. 지난 1월 발생한 서울서부지법 난입·폭력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비상계엄 사태 전부터 위기가 누적돼 왔다는 평가가 많다. 그간 쌓인 극단적 분열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거쳐 열린 20대 대선은 ‘상대 후보는 절대 안 된다’는 정서를 자극해 표를 모으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후 취임한 윤 전 대통령은 전방위적인 갈라치기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며 적대를 국정운영 동력으로 삼았다. 건설노조는 ‘건폭’,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는 ‘의사 카르텔’, 금융·통신·택시 업계는 ‘패거리 카르텔’로 지칭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며 육군사관학교 흉상 이전을 추진하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띄우며 역사 전쟁을 다시 불러왔다. 비상계엄 선포 대국민 담화에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윤석열 정부 시기처럼 대규모·조직적 폭력으로 발전한 경우는 없었다”며 “윤 전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 없이 반대자와 협상하지 않고 척결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사회에 깊은 분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상대를 ‘대화할 수 없는 적’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면서 존중과 타협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위협받고 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22년 11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19개 조사 대상국 중 정치 분열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꼽혔다. ‘다른 정당 지지자와의 갈등 정도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 한국인 응답자 90%가 “매우 크다” 또는 “크다”라고 답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한국의 정치 양극화 현황과 제도적 대안에 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01명 중 92.6%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연구를 담당한 박준 한국행정연구원 공직역량연구실장은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를 보면 한국의 정서적 양극화는 민주주의 가치와 규범을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구속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가 열린 지난 1월18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직후 서울 안국역 일대에서 생중계로 선고를 지켜보던 탄핵 찬성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왼쪽 사진). 비슷한 시각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탄핵 반대를 외치던 시민 일부가 오열하고 있다. 문재원·성동훈 기자
전문가들은 오는 6월3일 열리는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시민들이 통합의 정치를 정치권에 요구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신경아 교수는 “정치권이 시민의 불안정한 삶을 해소하기보다 ‘적’을 만들어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며 “시민들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정치권을 향해 분열과 갈등을 줄여가는 정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생각은 달라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회복해야 한다”며 “정치적 이익을 지키려는 정치인보다 새로운 길을 여는 정치인에게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시민들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극단주의 세력의 확성기가 돼 각종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유사 언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분열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사회 통합의 출발점은 건강한 여론의 형성”이라며 “사실 검증 없이 보도하는 유사 언론을 규제하고 퇴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자독식 구조의 대통령제와 양당 구도를 바꾸는 제도 개혁도 함께 주문했다. 이런 한국 정치 시스템이 거대 양당의 적대적 정치를 고착화하는 만큼 극한 경쟁을 완화하는 방향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상대의 잘못에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며 다른 세력의 등장을 억누르는 적대적 공생 관계”라며 “비례대표의 비중을 늘려 양당 외의 다른 정당들이 유의미한 의석을 차지하면 정치 양극화의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재 정치 제도에선 ‘강 대 강’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정치인들이 정치 양극화가 심해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각성하고 협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