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국세조사보고’라는 통계자료를 낸다. 조선의 형편을 조사한 보고서란 뜻이다. 이는 전국의 문맹률 조사치가 담긴 제대로 된 첫 조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시기 문맹률은 얼마나 됐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어든 한글이든 아무것도 읽고 쓸 수 없는 문맹자가 78%(남자 64%, 여자 92%)에 달했다고 한다. 즉 인구의 80%가 문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역별·계층별 편차를 고려하면 더욱 심각해진다. 지주층의 취학률이 70%일 때 자작·소작농의 취학률은 1.5%밖에 안 되던 시대니 시골일수록, 못살수록 문맹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편차를 참작해본다면, 도시의 특정 계층을 제외한 여성의 문맹률은 95%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 시대라고 얼마나 달랐을까. 인구의 10%도 안 되는 사람들만 문자를 알던 시대, 한글 창제 이전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은 사람들만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짚는 것은 역사학의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역사학은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다룬다. 이 문장 하나에 역사학의 근본적인 한계가 담겨 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10%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문자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나, 이것도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뿐이지, 실제로 보존될 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었다. 읽는 건 어떻게 한다 쳐도 조리 있는 문장을 남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기 때문이다. 문맹률이 1%도 안 되고 글쓰기 플랫폼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도 정말로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구나 옛날에는 기록물을 만들어 남기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쉽지 않았다. 종이도, 먹도, 붓도 귀했다. 조선시대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40~50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모조지는 흔하지 않았다. 보존의 가치 기준이 달라지는 것도 문제다. ‘신라촌락문서’처럼 당대에는 쓸모없는 장부 뭉치라고 생각해 폐기하거나 재활용한 것이 요즘에는 너무 귀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록이란 건 기본적으로 몹시 편중되게 생산되고 편중되게 보존된다.
기록의 편중이 낳는 또 다른 문제는 관점의 편향이다.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형편이 아주 좋은 극상층 엘리트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금의 엘리트보다 훨씬 수도 적고 훨씬 더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엘리트들이 하층민에 대해 남기는 기록은 아무리 공평하고 객관적이고자 해도 그 시선을 통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왜곡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기본적으로 이런 엘리트 눈에는 하층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전반 지어진 한글 가사 <한양가>에서는 궁궐에서 일하는 군인, 별감뿐만 아니라 무수리나 종 같은 최하층의 모습을 묘사하지만, 비슷한 시기 규장각 검서관 출신이 한문으로 지은 <한경지략>에서는 승정원, 규장각 같은 관서와 관료들만 설명한다. <한경지략>의 저자는 자기 밑에서 일한 서리(하급 관리)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일찌감치 직시했다. 어떠한 사료든 그 특징과 한계를 엄밀히 고증하고 여러 기록을 비교하며 진실성을 저울질하는 것은 기록의 편중이나 관점의 편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든가 ‘여성사’처럼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분야들은 이런 문제점을 더욱 엄중하게 지적하며 탄생했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0조, “무엇이 망각되었는지를 항상 점검하라”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비단 역사학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사회대개혁을 외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분출하는 이때, 우리는 망각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항상 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것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