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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으로 무너진 일상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평안함, 충일감을 찬미한 시다. 소설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가 은사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일부를 인용해 친숙하다. “시절은 봄/ 봄날 아침/ 아침 일곱 시.// 언덕 중턱엔 이슬방울 진주 되어 맺히고/ 종달새는 높이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를 기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 사물이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장소에 존재하는 평범한 상태가 실은 우주의 섭리가 드러나는 비범한 상태임을 이 시는 보여준다. ‘언덕에 맺힌 이슬방울’ ‘높이 나는 종달새’ ‘가시나무 위를 기는 달팽이’와 같은 일상적인 일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고양하는 건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건 평소 당연한 일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친 일상적인 것의 의미를 새삼 곱씹게 하는 어떤 특별한 경험의 소산이기 쉽다.

‘시인과 촌장’의 ‘풍경’은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돌아오는) 풍경”이라고 한다. 이 노랫말의 의미를 한결 풍성하게 만드는 건 ‘제자리’라는 중의적 어휘의 쓰임새다. 제자리는 ‘있던 자리’를 뜻하기도, ‘있어야 할 자리’를 뜻하기도 한다. 전자라면 일상의 회복을 소망하는 과거지향적 노랫말이 되겠지만, 후자라면 좋은 일상의 도래를 희구하는 미래지향적 노랫말로 의미의 내포가 전혀 달라진다. ‘있던 자리’는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지속되기 힘들고, 지속되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참된 일상의 회복은 일상이 깨지기 이전으로의 단순 회귀가 아니라 좋은 일상을 세울 때만 가능하다. 그 노력을 포기하면 일상은 언제고 깨어지게 되어 있다. 페달을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다.

윤석열은 파면되었고, 넉 달여 불면의 밤을 보낸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상의 회복이 12·3 내란 이전으로 그저 돌아가는 것일 수는 없다. 한국 사회는 내란 이전부터 병들어 있었다. 대통령 윤석열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증상이었다. 12·3 내란은 ‘정치를 할 생각이 없는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대통령이 돼 의회정치와 국가의 공적 시스템, 민심을 무시하고 국정을 사유화하며 야당과 불화하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 1인 독재체제를 세우려 한 헌정 유린 사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아무런 제동장치 역할도 못한 정부, 윤석열을 좇아 내란을 심리적 내전으로 끌어올린 극우의 준동, 거기에 부화뇌동해 윤석열을 시종 옹호한 집권 여당 모습까지 포개면 12·3 내란의 입체적 실체가 완성된다.

이것만 놓고 보아도 정치검찰, 대통령 권력의 전횡과 사유화, 정치의 붕괴, 사회적 적대의 심화 등 병리현상이 어렵지 않게 추출된다. 검찰개혁·정치개혁의 당위 또한 쉽게 확인된다. 다수 논자는 경제적 양극화에서 비롯된 희망 상실이 여러 병리현상의 기저 연료가 되었으리라 분석한다. 그러므로 사회·경제 개혁을 통해 이런 문제까지 해소해야 내란은 완전히 극복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길이 쉬울 리 없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윤석열의 시행령 통치를 뒷받침한 이완규 법제처장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한 데서 보듯 내란의 잔불은 꺼지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민주공화국 수호의 결연한 의지다. 이 의지를 실천하는 건 무관용과 포용, 척결과 통합, 단죄와 연대라는 이율배반적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좁은 오솔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헤쳐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내란 세력과 그 추종 세력에 대해선 무관용 원칙을 확고히 견지해야 한다. 이들의 죄상을 낱낱이 들춰내 법적·정치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들은 개혁과 단죄의 대상이지 주체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려 한 이들이 정치개혁과 개헌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사기다. 이들이 정치에 기여하는 길은 스스로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 것밖에 없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담대한 연대와 통합이다. 민주공화국을 지킨 모든 이들은 구동존이의 지혜로 연합정치의 기반을 넓혀 내란 세력을 주변화하고 상생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그렇게 다수의 합의를 토대로 논의를 튼튼히 쌓아가야 검찰개혁·정치개혁·개헌·사회개혁·경제개혁과 같은 제도개혁도, 참다운 국민 대통합도 가능하다. 민주공화국의 내구성은 커지고 방벽 또한 두꺼워진다. 박근혜 탄핵 촛불혁명의 실패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래야 내란으로 무너진 일상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정제혁 논설위원

정제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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