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유예’ 무슨 일 있었나

미 증시 3대 지수 ‘기록적 급반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 90일 유예 발표로 미국 증시가 급등한 9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월가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트레이더 피터 터크먼이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뉴욕 | AFP연합뉴스
상호관세 전날 밤, 채권 ‘출렁’
심각한 의원들과 ‘1시간 통화’
다음날 아침, JP모건 회장도
“경기침체 가능성” 전했지만
“다 잘될 것” 꿈쩍 않던 트럼프
상무·재무 호출해 ‘깜짝 발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효 13시간여 만에 국가별 상호관세를 유예하기로 ‘급유턴’한 배경에는 채권시장의 위험 신호와 월가의 경고, 정치권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유예 조치가 동맹국 및 무역 파트너의 협상 제안을 끌어내기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전략적 결정’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상호관세 발효 시점을 전후로 혼란이 가중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경제적으로 광범위한 무역전쟁을 그대로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워싱턴포스트(WP)가 9일(현지시간) 관세 유예 ‘깜짝 발표’ 직전 18시간 동안 추적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적에는 상호관세를 둘러싸고 정·재계 여러 방면에서 쏟아지는 우려와 경고, 막판까지 갑작스럽고 예측 불허였던 상황이 담겼다.
미국 국채 투매 현상이 나타난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오후 9시쯤 출렁거리는 채권시장을 주시하며 폭스뉴스 <숀 해니티 쇼>를 시청했다. 최근 채권시장에선 투매가 이어져 미 국채 10년물 가격이 급락했다. 미 국채시장은 시가총액이 28조달러에 달하고 미 국채가 수많은 금융거래의 담보자산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근간으로 여겨진다.
이후 해당 방송에 출연한 공화당 상원의원들과 약 1시간 동안 통화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관세 여파에 따른 자동차 제조업체 등의 우려를 전했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다른 나라가 보복 조치를 할 경우 미국, 특히 텍사스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하나 이상의 주요한 무역협정을 신속하게 이뤄낼 것”을 권했다.
9일 오전 8시엔 ‘월가 황제’로 불리는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 제이미 다이먼의 폭스뉴스 인터뷰도 챙겨봤다. TV에선 “경제적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경기침체 가능성이 있다”는 다이먼의 경고가 흘러나왔다. 다이먼은 인터뷰에서 관세 불확실성 탓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출(투자)을 줄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고도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때까지만 해도 SNS 트루스소셜에 다이먼의 출연 소식을 알리며 “진정하라. 모든 것이 잘될 것”(오전 9시33분)이라는 글을 올렸다. 몇분 뒤에는 “지금이 매수하기 좋은 시점”(오전 9시37분)이라며 자신의 이니셜이자 뉴욕증시에 상장된 ‘트럼프 미디어 앤드 테크놀로지’ 종목 코드 ‘DJT’를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동시에 각국에선 상호관세를 둘러싼 협상 시도가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31% 상호관세가 부과된 스위스 카린 켈러주터 대통령과 25분간 통화했다. 켈러주터 대통령은 스위스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됐다며 관세 완화 조치를 요구했다고 전해졌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철강·알루미늄 25% 관세에 대해 보복관세를 확정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통상담당위원 마로스 셰프코비치의 전화를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이날 정오가 되어갈 때쯤 러트닉 장관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백악관 참모들 집무실인 웨스트윙 TV에선 우려가 담긴 경제 불안 뉴스만 흘러나왔다고 WP는 전했다. 베선트 장관 역시 관세와 세법 등을 논의하기 위해 공화당연구위원회(FSC)에서 연설할 예정이었으나 급히 취소하고 백악관으로 향했다.
오후 1시18분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상호관세 대부분을 90일 유예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7일 백악관 대변인은 ‘90일 유예 가능’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일축했지만 이틀 만에 사실이 됐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백악관 일부 참모진은 트럼프 대통령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허겁지겁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같은 시간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하원 세입위원회 청문회 중 관세 유예 소식을 전해 듣고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전부터 강경하게 고집해온 관세정책에서 한발 물러선 것은 금융시장과 정치권, 지지자의 반발을 여전히 무시하지 못한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특히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 언론은 이번 관세 유예 조치를 두고 “결국 트럼프는 혼란에 빠진 채권시장에 굴복했다”는 평가를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