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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한 사회가 건강의 불평등 낳는다

입력 2025.04.10 21:01

수정 2025.04.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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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10일(현지시간) 미국 오클라호마시에서 경찰의 무차별적인 공권력 사용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6년 7월10일(현지시간) 미국 오클라호마시에서 경찰의 무차별적인 공권력 사용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기 관리 실패·유전 결함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미국 사회

상대적으로 열악한 흑인 건강
일상적 차별이 더 근본적 영향

미국 미시간대학교 공공보건대학원의 알린 T 제로니머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 주류 백인들은 질병을 개인의 자기 관리 능력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급성 바이러스 감염, 유전 관련 질환, 사고로 인한 때이른 죽음을 제외하면, 적당히 절제하면서 식단, 운동, 생활방식에서 의사가 권하는 건강에 이로운 선택들을 하는 한 모든 사람이 길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이 때문에 주류 백인들은 흑인이나 라틴계 주민 등 미국 소수 집단 구성원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이를 자기 관리의 실패로 취급하는 습성이 있다. 소외 계층 사람들의 절제력이 부족해 몸에 나쁜 음식이나 마약 등을 과도하게 섭취하고 운동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의 유전자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의 건강 격차가 생긴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책과 삶] 불공정한 사회가 건강의 불평등 낳는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알린 T 제로니머스 지음 | 방진이 옮김
돌베개 | 509쪽 | 3만1000원

공공보건 전문가인 제로니머스 교수는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에서 이 같은 주류 백인들의 관점, 그리고 이들의 관점에서 공공보건 정책을 설계해온 미국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외받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건강이 손상되는 이유는 자기 관리의 실패나 유전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주류 집단의 차별과 혐오 때문이다.

불평등 사회에서 소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건강이 어떻게 나빠지는지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웨더링’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웨더링은 건강한 신체가 세포 수준에서부터 ‘마모되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생리학적 스트레스 반응이 여러 해에 걸쳐, 최종적으로는 수십 년에 걸쳐 반복적 내지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어 생기는 결과”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3월 코로나에 걸려 51세의 나이에 사망한 흑인 버스운전기사 제이슨 하그로브의 사례를 보자. 하그로브는 재택근무는커녕 입도 가리지 않고 재채기를 해대는 손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단도 없이 버스를 운전했다. 그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영상을 SNS에 올린 지 일주일 후 사망했다. 고령도 아니고 책임감도 강했던 하그로브가 왜 코로나에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흑인 산모는 백인 산모에 비해 분만 중 사망률이 왜 거의 3배 더 높을까. 부유한 근교 지역 백인 청소년은 절반가량이 85세까지 살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흑인 밀집 구역의 16세 흑인 소녀가 85세까지 생존할 가능성이 29%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흑인들의 건강이 상대적으로 나쁜 것은 일상에서 흑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 때문에 신체가 마모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신체는 위험 상황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해 위험에 대응한다. 공포에 직면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스트레스에 대한 정상적인 신체 반응이다. 문제는 스트레스 상황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상시화하는 경우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면 신경내분비 계통과 심혈관 계통, 대사 계통, 면역 체계를 비롯해 신체의 모든 주요 계통이 악영향을 받는다.

일상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겪는 소수 집단 구성원은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점점 대응 능력이 저하된다. “운동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달리기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 흑인이라면 아모드 아버리 사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모드 아버리는 조깅을 하던 중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총격을 당해 죽었다. 흑인이 과연 충분히 긴장을 풀고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수면을 취할 수 있을까? 브리오나 테일러가 자신의 집에서 자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는데도?”

흑인과 백인 사이에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힐빌리’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미국 켄터키주 애팔래치아의 가난한 백인들도 주류 백인 집단보다 건강 상태가 나쁘다. 웨더링은 흑인 대 백인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정체성 집단의 구성원에게 더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웨더링 현상은 미국 원주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미국 내 다른 소수 집단 구성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웨더링이 주류 집단의 차별·혐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저자의 논지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온갖 차별을 뚫고 주류 사회에 진입한 사람일수록 웨더링에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가정이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란,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유색인종 아동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버티면 이른 나이에 웨더링을 당하고 신체의 많은 계통이 손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웨더링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공공보건이나 복지 정책을 짜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1996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한 ‘개인적 책임과 근로 기회 조정법’은 십대 흑인 여성 임신율을 떨어뜨린다는 명목으로 십대 부모의 복지수당을 삭감해 많은 흑인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해법은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구성원이 겪는 생리학적 스트레스를 단절하는 것을 목표로” 공공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논의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인종 사회가 아닌 한국의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가 거듭 강조하듯, 웨더링은 차별과 혐오가 공기처럼 만연한 사회의 소수 집단 구성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은 십수년째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지 못할 만큼 차별 문제에 둔감한 사회다. 소외층의 몸을 갉아먹는 ‘웨더링’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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