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일인 올해 4월4일까지, 나는 ‘말’에 대해 깊이 고민해왔다. 그 기간 동안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언어의 혼탁도 절정에 달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언어는 여전히 극단의 경계를 맴돌고 있다.
높은 학벌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거짓과 교묘한 말로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 법률가, 학자뿐만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야 할 종교인, 정론을 펼쳐야 할 언론인들조차 부끄러움 없이 불순하고 뒤틀린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나는 의문을 품는다. 이들이 정말 문장을 잘못 읽고 그릇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자신들의 진영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논리를 조작하는 것인지. 윤석열을 변호하던 이들의 언변을 들으며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된다고 하려니, 당신들도 참 힘들겠구나.”
하늘이 열리고 인간의 길이 시작된 출발점은 바로 ‘말’의 탄생이었다. 생명이 움트고 피어나는 힘도 결국 언어에서 비롯된다.
생명의 언어는 어둠과 혼돈을 가르고 나아가는 빛이며, 진리의 말은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다. 말이 생명을 불러냈기에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어 또한 생명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붓다와 예수는 그런 생명의 요청에 ‘말’로 응답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어는 생명의 빛을 흐리게 만들고, 오히려 생명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회복은 곧 생명의 회복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수양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고사성어 중 ‘말’에 대한 경구가 유난히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붓다와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했다. 모든 종교는 거짓된 증언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언어를 엄격히 금지한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주장하거나, 공동체를 해치는 언행을 반복한 제자들을 승단에서 영구 추방했다. 붓다의 ‘탄핵’이자 ‘파면’이었다.
공자는 ‘교언영색’을 경계했다. 화려한 말과 연출된 태도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은 오늘날 정치인들, 특히 ‘태세 전환’에 능한 이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일구이언’이 공공연히 용인되는 시대가 됐다. 학문적 소신을 왜곡해 권력자에게 유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곡학아세’라는 표현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우리는 신념을 저버리고 권력에 기대는 지식인, 법조인, 정치인을 볼 때마다 깊은 씁쓸함을 느낀다. ‘무지가 욕망을 낳는다’고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욕망이 무지를 낳는다’는 깨달음을 준다.
대통령 탄핵 이후 쏟아진 수많은 말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겉보기에 타당하고 도덕적으로 들리는 문장들, “이제는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자” “배제와 혐오를 멈추고 관용과 포용으로 나아가자” “극단의 정치를 극복하고 중도의 길을 걷자”. 그 말들만 따로 떼어 보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왜 이 말들이 불편하게 다가올까? 그 말을 하는 이들의, 의도(맥락과 인과)를 생략한 채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맥락 없는 언어는 때때로 노골적인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 없이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말하는 ‘통합’과 ‘관용’은 사회를 더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역사는 압축과 비약은 있을지언정 생략은 없다. 반성과 책임을 생략한 통합은 결국 그 대가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할 것이다.
말이 생명의 본질을 회복하고 공동체가 건강하게 되살아나기 위해 이 땅의 선하고 지혜로운 시민들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주문한다. 주문. 거짓과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 사회를 미궁에 빠뜨리는 불순한 말들을 파면한다.

법인 스님 화순 불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