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라면을 끓일 때면 계량컵을 꺼냈다. 그게 라면이라는 경이로운 세계를 대하는 내 나름의 자세였다. 왜 맛있지? 내가 뭘 했지? 어떻게 물만 끓이면 5분 만에 이렇게 맛있는 라면이 되지? 요리를 못하는 사람을 보고 라면도 못 끓인다고 하는데, 어떻게 라면을 못 끓이지? 어쩌면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있으면 망하는 것일지도 몰라. 나중에 알고 보니 망하지 않으려면 정확히 내가 한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시키는 대로 끓이기.

하지만 뭐든지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라면 회사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당시 내 마음은 라면에 대한 경이를 넘어 두려움에 가까웠다. 난 이 과정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이제 이렇게 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가? 끓여야 하는 라면이 두 개를 넘어가면 혼란에 빠진다. 그 해결책은 봉지에 적혀 있지 않으니까.

두 개를 끓이면 물은 두 배? 그런데 그렇게 끓이면 라면이 한강물이 된다던데. 엠티를 갔더니 끓여야 하는 라면이 열 개였다. 이건 드럼통에 끓여야 하는 건가? 이렇게 물이 많은 것이 맞아? 줄여야 한다면 얼마나? 혼돈과 혼란. 누구 라면 끓일 줄 아는 사람이 끓여봐. 그리고 한강물에 퉁퉁 불은 라면 면발을 나눠 먹으며 이게 잘된 건지 아닌 건지도 헷갈렸던 이십대 초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보다도 캠핑을 시작한 것 덕분이다. 라면을 끓이는 데 있어서 계량컵보다 민망한 이야기는, 집에서 라면을 끓이는 냄비는 정해져 있는데 그걸 사용해야 물양이 가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캠핑을 떠나는데 집을 통째로 가져갈 수는 없으니 코펠과 구이바다(캠핑용 브루스타)를 이용해 라면을 서너 개씩 끓여야 했는데, 이게 내 ‘라면공포증’을 직격으로 마주하며 해결하게 했다.

상큼한 레몬그라스
라임으로 신맛 더해
얼얼한 쥐똥고추와
새우도 챙겨 넣으면
나의 라면 실험 완성

이게 맞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로 물과 라면 수프를 끓이며 고민하는데, 갑자기 해결책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맛을 보면 되잖아. 짜면 물을 더 넣고, 싱거우면 면을 넣기 전에 더 끓이던가 소금이나 된장을 풀어. ‘당연하잖아, 바보인가?’ 싶겠지만 전문가(라면 회사)에게 너무 의존하다 보니 이걸 깨닫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난 이제 자유야! 라면에 대파와 달걀보다 많은 것을 넣을 수 있어! 완벽하게 끓여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니 라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유를 만끽하면서 제일 먼저 만들어낸 나만의 라면 레시피가 똠얌 라면이다. 라면 뒷면 조리법에 집착하던 사람답게 좋아하는 제품을 딱 정해놓고 순수한 라면 맛을 즐기기 때문에 라면에 이것저것 베리에이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 똠얌 라면만큼은 반드시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비교적 비슷한 종류의 제품이 오래도록 장수한 것이 예전 우리 라면 시장의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거의 매주, 매달 신제품이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다양한 라면 중에서 제일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새콤매콤한 똠얌 라면이기 때문이다. 해외 직구를 하지 못하면 이 맛을 볼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똠얌쿵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라면으로 만드는 것이 그나마 난도가 낮겠지. 그래서 좋아하는 맛을 재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재료를 한두 개씩 더하고 빼면서 캠핑 요리 과학 시간을 펼쳤다.

그래서 딱 1인분에 완벽한 캠핑용 사각 반합으로 끓이는 똠얌 라면 레시피를 완성했다. 향신료를 마련할 필요는 있지만 진짜 똠얌쿵을 만드는 것에 비하면 감수할 만하다. 똠얌 페이스트가 없어도 되고, 절대 빼면 곤란한 재료와 타협 가능한 재료를 정리한 리스트를 알아보자. 라면은 좋아하는 것으로 고르면 되지만 맛이 크게 독특하지 않고 무난한 빨간 국물 라면이 좋다.

꼭 있어야 하는 재료는 우선, 레몬그라스다. 똠얌을 좋아한다면 이 허브는 냉동 보관도 잘되는 편이니 구입해서 냉동했다가 하나씩 꺼내서 쓰자. 그냥 레몬이나 말린 것으로는 대체하기 힘든 향기롭고 신선한 꽃향기가 레몬 향과 조화를 이룬다. 극단적으로 정말 아쉬울 때는 이것만 넣고 간을 맞춰도 소심한 똠얌쿵이 지나간 느낌이 난다.

그리고 레몬 대신 라임! 라임은 신맛을 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신선한 것을 한번 짜 보면 알 수 있듯이 특유의 스파이시하게 찌르는 향이 있다. 다른 감귤류로 대체하기 곤란하다. 예전에 비해 그래도 구하기 쉬워졌고 무엇보다 넣으면 예쁜 가니시 역할도 하니까 꼭 넣자. 그리고 설탕. 백설탕, 황설탕 모두 좋으니 가루 설탕으로 넣어야 한다. 꿀과 물엿으로 대체하지 말자.

대체하지 않으면 좋지만 대체해도 좋은 재료로는 우선 피시 소스가 있다. 꼭 넣어야 하는 특유의 쿰쿰한 감칠맛을 담당하는데 솔직히 없을 때는 멸치 액젓을 넣고 있다. 하지만 빼지는 말 것. 생강과 비슷하게 생긴 태국의 향신료 갈랑갈은 직접 손질해보면 껍질을 벗길 때부터 생강에 꽃과 향신료 풍미가 첨가된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이 올라와서 대체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날것으로 구하기 쉽지 않고 생각보다 빨리 상해서 없으면 울면서 그 대신 생강을 넣는다.

정말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태국산 말린 고추. 매운맛이 나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말린 고추를 쓰거나 크러시드 레드 페퍼, 우리 고춧가루를 넣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매운맛에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니 쥐똥고추가 있으면 넣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략 가능한 재료는 카피르 라임 잎이다. 넣으면 꽃과 향신료 풍미가 더해져서 좋고, 말린 것으로 유통할 수 있어 구해놔도 상관은 없지만 문제는 영 줄어들지 않아서 영원히 찬장 속에 있다. 있어서 넣지만 없으면 소신껏 일단 라임으로 대체하는 중이다.

여기에 부재료는 원하는 똠얌쿵 재료로! 나는 똠얌‘쿵’(쿵은 새우라는 뜻)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 냉동 칵테일 새우를 넣고, 그냥 식감을 좋아해서 느타리버섯을 넣는다. 마라탕을 주문할 때처럼 좋아하는 똠얌쿵 재료가 있다면 아무것이나 팍팍 넣어도 된다. 라면이 요리되는 순간! 캠핑장은 요리 실험장!

똠얌 라면 레시피

재료

라면(개인적으로는 진라면 순한맛을 쓴다) 1봉, 물 550㎖(라면 봉지 기준에 따라 정량으로), 카피르 라임 잎 1장, 말린 고추 1개(태국 고추 등 작으면 2개), 레몬그라스 1대, 느타리버섯 1줌, 냉동 칵테일 새우 3개, 피시 소스 1큰술, 설탕 1큰술, 라임 1/2개(취향에 따라 조절)

만드는 법

1. 갈랑갈은 껍질을 제거하고 송송 썬다. 레몬그라스는 뿌리와 마른 줄기 부분을 적당히 잘라내고 두꺼운 부분을 탕탕 두드려 살짝 으깬 다음 5㎝ 길이로 썬다. 느타리버섯은 끄트머리만 잘라낸다. 라임은 꾹꾹 눌러서 반으로 썬다.

2. 사각 반합에 라면 봉지에 쓰인 정량대로 물을 넣는다. 라면 수프와 건더기 수프를 넣는다(라면 수프는 80%만 넣어도 된다). 카피르 라임 잎과 말린 고추, 손질한 레몬그라스와 갈랑갈을 넣는다.

3. 물이 끓으면 반으로 나눈 라면 면과 버섯, 새우를 넣는다.

4. 면이 반쯤 익으면 라임즙을 전부 짜서 넣고 피시 소스와 설탕을 넣는다.

5. 익으면 완성.

TIP

갈랑갈, 레몬그라스, 말린 고추, 카피르 라임 잎은 먹지 않는다. 빼고 내면 깔끔하지만 어른들끼리만 있으면 알아서 빼고 먹게 둘 때도 있다. 어차피 딱딱해서 먹다 보면 아 이건 씹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다.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