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널 사냥하려는 사람보다 널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널 사냥하려는 사람보다 널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 김정호 수의사

인간의 전시산업과 재미를 위해
좁은 곳 갇혀 연명하던 동물의 왕

청주에 온 후 보살핌과 응원 속
움츠림 펴는 모습에 희망을 본다

사자가 나오는 영화가 많다. 야생의 세계에 매혹되어 야생동물 수의사의 꿈을 꾸게 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한 장면이다. 여주인공 카렌은 사자가 다가오자 데니스에게 총을 쏘라고 재촉한다. 데니스는 “도망치면 사냥감인 줄 아니까 가만있어요”라고 차분히 이야기하며 사자의 행동을 관찰한다. 사자가 다른 곳으로 가고 카렌(메릴 스트리프 분)과 데니스(로버트 레드퍼드 분), 둘의 대화가 이어진다.

“도대체 사자가 얼마나 가까이 올 때까지 안 쏘려고 했어요?”

“사자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 거예요.”

“내가 사자의 점심이 될 뻔했잖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사자 의 잘못은 아니죠. 사자니까!”

데니스는 사자에 대한 태도가 남다르다. 섣부른 오해가 아니라 관찰을 통해 사자의 행동을 판단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줄였다. 데니스 역을 맡았던 로버트 레드퍼드는 선댄스 영화제를 만들어 자유롭게 사고하는 독립 다큐 영화들을 육성하고, 환경을 지키는 존경받는 운동가가 되었다.

[김정호의 이상한 동물원]널 사냥하려는 사람보다 널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반면 실제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국립공원에서 보호받던 사자 세실을 사냥한 미국인 파머 같은 사람도 존재한다. 국립공원 내에서 사자 사냥이 불법이란 것을 알고 있는 파머는 원주민 사냥꾼들에게 돈을 주고 세실을 공원 밖으로 꾀어낸다. 배고픈 세실은 먹이에 이끌려 보호구역을 벗어났고 기다리고 있던 파머의 석궁에 맞아 몇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갔다. 파머의 목적은 단지 벽을 사자머리로 장식하기 위한 일명 트로피 사냥이었다. 세실이 달고 있던 대학연구팀의 위치추적기로 상황이 파악됐고 목이 잘린 세실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잔인한 트로피 사냥은 세계인들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파머는 그 후 다시 아시아로 건너가 사냥을 계속했다고 한다. 우리의 도덕 감정과 다르게 그의 행동은 합법이다.

<오즈의 마법사>에도 사자가 나온다. 주인공들 모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구하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함께 여행한다. 사자는 자신을 겁쟁이라 여기고 용기를 얻기 원한다. 겁쟁이 사자는 청주동물원에 오기 전 잔뜩 움츠려 있던 바람이를 많이 닮았다.

바람이는 실내동물원의 먹이 체험용 사자였다. 사자에 대한 제보 영상을 본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의 실내동물원을 비난했다. 영상 속 사자는 어둡고 좁은 실내공간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동물원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해당 사자를 청주동물원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김정호의 이상한 동물원]널 사냥하려는 사람보다 널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이런 여름날엔 갈기를 벗고 싶어!

대표도 “사자의 여생은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흔쾌히 사자를 내어주었다. 평균수명을 웃도는 노령 사자였고 사람들의 공분도 참작됐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바람이의 사연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덕분에 청주동물원이 알려지고 추구하는 방향성에 탄력을 받았다. 더 좋은 삶을 바란다는 의미의 바람이! 봄부터 불던 남서풍을 타고 김해에서 청주로 왔다! 인스타그램에 썼던 일기를 통해 그때의 바람이를 다시 떠올려 본다.

2023년 7월7일: 이송 3일째 사자 바람이는 내실과 내실 앞 마당만 오갑니다. 흙바닥 위로 하늘이 보이는 간이방사장에는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사자 담당 동물복지사도 밥만 살짝 놓고 옵니다. 과거 좁은 공간에 살았던 호랑이들도 집을 좀 넓혀주자 좁았을 때의 동선을 반년이나 유지한 뒤에야 넓어진 공간을 사용했던 걸 보면 바람이도 그럴 만합니다. 더욱이 노령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력이 떨어진 바람이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주 방사장에 있는 먹보와 도도는 바람이가 있는 곳이 꽤나 신경 쓰이나 봅니다. 어제저녁 무렵, 숲으로 둘러싸인 사자들의 공간은 새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오늘은 숲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원합니다. 내실에 있는 바람이도 분명 듣고 있을 겁니다!

2023년 7월19일: 바람이가 온 지 2주가 지났습니다. 아직 활동반경이 여전하지만 먹이를 가져오는 담당 동물복지사의 발걸음 소리는 바람이를 기쁘게 합니다. 더운 날씨로 식욕이 줄어들기 마련인데 바람이는 4kg의 소고기와 닭고기를 한자리에서 다 먹습니다. 바람이는 2004년생으로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노령입니다. 말 못하는 바람이에게 내재한 질병과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정기검진을 앞두고 있습니다. 검진을 위해선 마취 안정성이 확보돼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선 마취 전에 혈장단백질(마취약물결합)이나 헤모글로빈(체내산소운반) 등을 확인하는 혈액검사가 반드시 선행돼야 합니다. 며칠 전부터 자발적인 혈액채취를 위해 바람이의 메디컬트레이닝이 시작됐습니다. 같은 이유로 한 살 많은 수컷 먹보와 암컷 도도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먹보와 도도는 바람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서 가을이 와서 서로의 체온이 싫지 않기를 바랍니다.

2023년 8월3일: 더위가 정점이니 여름이 멀지 않았습니다. 요즘 같은 더위에는 투쟁 시 목을 보호하는 바람이의 갈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실은 선풍기가 돌아가 좀 낫지만 바람이는 이제 간이방사장에 나와 후덥지근한 숲속 공기를 자주 마시곤 합니다. 오즈의 마법사가 준 녹색물을 마시고 용기가 생긴 사자처럼 가슴 깊이 녹색 공기를 채운 바람이는 용기를 가지고 주변 물건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담당 복지사가 먹보와 도도가 쓰던 통나무를 바람이 칸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바람이는 두 사자의 냄새가 밴 통나무를 죽부인처럼 끼고 놉니다. 곧 만날 친구들의 체취에 익숙해지겠죠! 유명세를 탄 바람이를 보기 위해 많은 분이 오십니다. 아직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바람이와 멀리서 오신 분들 모두의 만족을 위해 우선 입원실 CCTV를 떼다가 바람이가 있는 곳이 보이도록 설치했습니다.

2023년 8월10일: 야간당직자만 남기고 모두 퇴근한 시간! 홀로 돌아보는 동물원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토이스토리>의 장난감들처럼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면 동물들 이야기를 엿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암사자 도도는 캣타워에 올라가 땅보다 먼저 비를 맞고 있습니다. 빗소리가 제 발걸음 소리를 감춰 평상시 도도의 모습을 좀 더 오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 실내에 길들여진 바람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의 촉감이 아직 내키지 않습니다. 대신 문 가까이 앉아 내리는 비를 한참이나 보고 있습니다. 옆에 사는 염소는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양은 비를 즐기는 모습이고요. 동물원 동물은 야생과 가축 사이 어디쯤일까 생각해봅니다. 야생동물이지만 사람이 데리고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길들인 것에는 언제나 책임이 있다”는 어린왕자와 친구가 된 여우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바람이는 만져볼 수 있는 귀여운 새끼동물 생산이라는 동물전시산업에 의해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성체가 되어선 배고픈 백수의 왕을 먹이로 꾀어보는 재미를 위해 좁은 곳에 갇혀 연명했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 파머는 줄고 데니스가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나이 든 바람이가 구조되어 전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근거다. 글을 쓰면서 오즈의 마법사 OST ‘Over the rainbow’를 듣고 있다. “무지개 너머(somewhere)는 하늘이 푸르고 파랑새가 나는 곳이며 근심은 레몬 사탕처럼 녹고 우리가 감히 꾸는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가사가 참 좋다!



[김정호의 이상한 동물원]널 사냥하려는 사람보다 널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김정호
청주동물원에서 20년 넘게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동물원이 갈 곳 없는 야생동물들의 보호소이자 자연 복귀를 돕는 야생동물 치료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 AD
  • AD
  • AD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