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툰작가 민모씨(31)가 지난달 15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비상행동의 ‘탄핵 촉구’ 집회에서 그린 그림을 들고 있다. 민씨 제공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전국농민총연맹(전농)의 ‘2차 상경 집회’가 열린 지난달 25일 민모씨(31)의 손에는 작은 스케치북과 펜이 들려 있었다. 민씨의 눈은 빠르게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을 좇았다. ‘파면은 천명이다’ ‘윤석열을 파면하라’ 등 깃발을 든 사람들, 바삐 현장을 누비며 시민들을 챙기는 자원봉사자들, 응원봉을 들고 은박 담요를 두른 시민들의 모습을 작은 스케치북에 빼곡히 그려나갔다.
3년 차 웹툰 작가인 민씨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집회에 나섰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회, 동덕여대 집회 등 ‘응원봉 시민’들이 연대에 나설 때마다 민씨도 따라나섰다.그가 든 작은 스케치북은 본래 여행을 다닐 때마다 즐거운 순간을 담던 것이었다. 지난 5개월간 민씨의 스케치북에는 여행지의 풍경 대신 광장의 시민들이 그려졌다.
민씨는 1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광장을 그리기 시작한 건 동료 시민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3일 밤 11시30쯤 한창 웹툰 작업을 하던 민씨는 뒤늦게 계엄 선포 사실을 알게 됐다. ‘국회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서울로 가는 버스는 끊긴 상황이었다. 총을 든 계엄군들이 두렵기도 했다. 지체없이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씨는 “계엄이 선포된 당일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간 체력적으로도 지치고 심적으로도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내 그림으로 이분들께 빚을 갚자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웹툰 작가 민씨가 지난 3월 25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전농의 2차 상경 집회에서 집회 현장을 그린 그림을 들고 있다. 민씨 제공
‘기록자’의 시선에서 본 광장은 ‘그간 보이지 않던 약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난 공간’이었다. 민씨는 “각양각색의 깃발이 함께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그간 윤 전 대통령이 약자를 무시해 왔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약자와 그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생생히 그림에 담기 위해 마치 파노라마(넓은 범위의 풍경을 사진 한장에 담는 촬영기법) 사진처럼 보이도록 묘사했다”고 말했다.
민씨가 바라는 세상은 ‘누구도 처절하지 않은 세상’이다. 민씨는 “탄핵 이후에는 어떤 노동자도 고공에 오르지 않고, 장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지하철 바닥을 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으면 한다”며 “집회에 나서야 할 이유가 사라진 세상이 돼서 다시 스케치북에 집회 현장이 아닌 여행지를 그릴 날이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씨는 그런 세상을 위해 “서로에 대한 다정함으로 연대하자”고 했다. 그는 “그간 광장에 나서며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호의가 당장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닿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세상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장의 일원으로서 함께할 수 있어 영광스러웠다. 뜻을 모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또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웹툰 작가 민씨가 지난 3월 18일 비상행동 측 ‘파면 촉구 집회’에서 그린 눈 내리는 경복궁 풍경. 민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