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뜻하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려 땅이 촉촉이 젖어 있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따라 망우산 둘레길을 걷던 중, 그만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밟아버렸다. 신발은 엿처럼 끈적끈적한 진흙으로 엉겁이 되었다. 야단났다. 또 ‘털팔이’처럼 뭘 묻히고 왔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듣게 생겼다.
‘엉겁’은 엿처럼 끈끈한 물건이 범벅이 되어 달라붙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 ‘엉겁’은 요즘 하는 일 없이 사전 깊숙한 곳에 쓸쓸히 앉아 있다. 단짝 ‘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이라는 발음 때문에 간혹 엉겁이 ‘엉겹’으로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을 만나면 즐겁다. 함께 뭉치면 ‘엉겁결’에 갑갑한 사전 속을 나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
엉겁의 친구인 ‘결’은 ‘때’ ‘지나가는 사이’ ‘도중’과 같은 시간적 의미를 더하는 말이다. 엉겁과 달리 ‘결’은 쉼 없이 수많은 단어와 어울린다. 귀, 꿈, 말, 아침 등과 만나 ‘귓결’ ‘꿈결’ ‘말말결’ ‘아침결’과 같은 다양한 말을 만들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중 ‘말말결’은 좀 낯설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함께 있던 결이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면 엉겁은 또다시 사전 속에 갇혀 지내야 한다. 이럴 때 엉겁은 참 당혹스럽다. 갑자기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흔히 ‘엉겁결’이라는 말을 쓴다. 미처 생각지 못한 상황에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면, 누구나 정신이 멍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엉겁결’이다.
문득 강아지랑 진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나를 보며 털팔이 타령을 할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털팔이는 경상도 사투리로, ‘덤벙대는 사람’이나 ‘조심성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사전 속에서 홀로 ‘결’을 기다리는 ‘엉겁’처럼, 어쩌면 아내는 털팔이처럼 덤벙대는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엉겁을 떼어내며 엉거주춤 서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