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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가 위기다

입력 2025.04.13 21:18

수정 2025.04.1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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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전성기다. 세계사적으로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번성한 적 없다. 굳이 위기를 말한다면, 정치가 위기이지 민주주의는 아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은 소수가 다수를 혈통과 계급, 종교와 돈의 힘으로 지배한 과두정 체제였다. 아테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 같은 ‘자유의 시간’은 짧았고, 그때에도 피의 정변은 잦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27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한 뒤 들어선 ‘30인 참주’ 시대에만 1500명이 처형됐다.

현재 민주주의, 한쪽 옳음만 강요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부모가 아이를 재우면서 하던 절박한 기도는 “전쟁과 굶주림, 질병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였다. 근대 이후 종교전쟁과 내전, 노예무역의 현장은 그야말로 인간 도살장이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존엄하다거나, 자유와 평등을 불가침의 권리로 정부를 세운다는 생각에 인류가 동의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전 세계 국가의 절반 가까이가 민주주의 체제로 분류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 세기 전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처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강력한 이념이 지금은 없다는 사실도 놀랍다. 명실상부하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다.

어떤 사물의 본성을 깨닫게 되는 때는 그 사물의 전성기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고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울 때라야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목적을 실현하려 했는지, 그것이 무엇에 유익하고 무엇에 유해한지를 알 수 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귀할 때와 민주주의가 흔할 때의 민주주의는 같지 않다.

투쟁해야 할 ‘민주화 운동의 시대’와 민주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이 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시대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가진 본성, 즉 그것이 가진 장단점을 볼 수 있는 시대다. 동시에 민주주의가 오용될 때의 문제 또한 경험하는 시대다.

이를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역설이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의 글로벌 전성기가 곧 포퓰리즘 폭발의 시대, 정치 양극화의 시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민주주의가 세계적 대세가 되자마자 곧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과 영국에서부터 위기론이 대두되고, 이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민주주의 위기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 유일 이념 시대는 유일신만 강요되는 사회와 유사한 문제를 낳는다. 핵심은 순수하고 순결한 열망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다른 것은 쉽게 이단이 되고 이적시된다. 이게 문제다.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의 순수 원리는 ‘인민 주권’과 ‘다수 지배’다. 다수 인민의 명령, 일반 당원의 뜻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는 배타적 열정이야말로 순수 민주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다.

다원 민주주의 위한 정치복원을

우리의 경우 민주주의의 순수 열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팬덤 포퓰리즘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순수 민주주의를 말한다. 한쪽에서는 청년들의 미래가 걱정이라며 반국가 세력과 싸우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다른 쪽에서는 ‘수박 박멸’과 내란 동조 세력 척결을 위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양쪽 모두 자신만의 순수 시민들로 거리를 채울 동원 능력을 갖췄다. 동시에 정치는 사라졌다.

팬덤 시민은 민주적인 척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짜로 민주주의자다. 순수한 민주주의를 소망한다. 친북 세력이 청산된 순수 민주주의, 독재 세력이 발붙일 수 없는 순수 민주주의는 거짓 열망이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국가도, 사회도, 국민도 개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열망하는 변화를 약속하는 정당이 번성하길 바란다. 그 밖의 다른 정당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혐오하는 그들은 진정한 ‘일당제 민주주의자’다. 학자들이 말하는 정치 양극화란 간단히 말해, 양 진영으로 나뉜 두 일당주의의 싸움이다. 다른 목소리는 ‘적전 분열’이요, 상대를 돕는 ‘간첩질’이며, 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는 다원 민주주의에서만 제 역할을 한다. 정치적으로 옳은 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그런 정치적 생각‘들’ 사이의 경쟁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다원 민주주의의 굳은 믿음이다. “토론이 필요한 이유는, 진리란 찬반의 어느 한편보다는 그 사이에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이 공유되어야 정치가 산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옳음만 강요되는 순수·팬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보고 있다. 다원 민주주의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도래를 걱정하는 위기론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래도 정치 위기를 더 말하고 정치 복원을 더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다원 민주주의의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정치가 위기다. 아주 심각한 위기다.

박상훈 정치학자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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