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 걸려 ‘윤석열 파면’을 맞았는데 기쁨의 유효기간이 나흘도 가지 않았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던 한덕수 권한대행은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지명을 감행했다. 지명된 이들의 면면도 놀랍다. 헌재 결정을 무를 수 없으니 헌재에 얼룩이라도 묻히겠다는 심산인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던 계엄 선포 담화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를 부정하는 세력들과 맞서 싸워야 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김문수의 대선 후보 출마 선언이 이어받았다. 윤석열의 대장놀이는 유효기간이 늘고 있다.
계엄을 떠받친 극우. 민주주의의 파괴를 정당화하고 지지할 준비가 된 세력이 있음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모두 알게 됐다. ‘윤석열 파면’이 남긴 숙제는 계엄 이전의 민주주의 회복에 그칠 수 없다. 극우가 사라지고 나서야 민주주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를 살려낼수록 극우의 세력화가 저지된다. 계엄 이후 우리는 극우를 살피기도 버거웠다. 그만큼 다시 세워야 할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며 조건이 무엇일지 숙고할 시간은 부족했다. 이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해야 한다. 극우로부터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는 특정 세력을 배제하거나 특정 세력이 집권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가능성의 울타리여야 한다. 극우가 아무리 울타리를 부수어도 그 밖으로 따라 나갈 이유가 없도록, 극우가 아무리 증오와 폭력을 선동해도 울타리 안에서라면 존엄과 안전이 보호되도록,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단호함이야말로 극우에 단호하게 대처할 방법이다. 헌재는 비상계엄 선포가 “민주주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가했다고 못 박았다. 그렇다면 이미 해를 입은 민주주의를 다시 세울 단호함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헌재 결정문에는 우리가 출발선으로 삼아도 좋을 실마리가 있다. 탄핵심판 결론의 첫머리, 민주주의의 본질은 “대등한 동료 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이라는 구절이다. 민주공화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대등한 동료 시민’으로 만날 수 있으려면,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첫 번째 과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거뜬히 시작할 수 있고 마땅히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조금 어렵다. 우리가 ‘자율적’이려면 누군가에 종속되지 않을 조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건, 인적으로 경제적으로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노동관계를 그대로 두고 자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협력적’이려면 함께 가꿀 것이 보여야 한다. 주거도 의료도 교육도 돌봄도 개인이나 가족에 떠넘겨져 공적인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협력은 이유를 찾기 어렵다. 생존이 종속적 관계에서 버티는 사적인 과제가 될수록, 공적 의사결정은 공적 제도를 장악한 상층 계급의 의사결정이 되어버린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져온 이유다. 공공성은 공화국의 조건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질문이 열릴 때 민주주의도 열린다. 경제성장의 약속은 질문의 봉합일 뿐 민주주의의 해법이 못 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보편적 노동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필수적 재화와 서비스가 어떻게 공적 의사결정 아래 생산되고 분배되게 할 것인가, 기후위기 시대에. 대선에서 모든 정치 세력이 응답해야 할 민주주의의 질문이다.
파면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민주주의의 질문은 평등을 우회할 수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며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것이 극우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가려는 이들을 끊임없이 키우는 토양이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내란 청산이 우선’이라는 말로 평등을 미루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란 청산’을 미루는 세력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