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미, 입장 명확히 해야…양방향 협상이어야”
미, 식품·디지털 규제 등 ‘비관세 장벽’ 불만 전달

유럽연합(EU) 깃발이 유럽중앙은행(ECB) 본사 앞에서 휘날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첫 관세 협상에 나섰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EU는 관세 조치가 유예된 90일 동안 협상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나 결과가 마땅치 않을 경우를 대비한 보복 조치도 여전히 고려하고 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만나 약 2시간 동안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이 지난달 EU에 부과한 알루미늄·철강 25% 관세 등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으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진 않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셰프초비치 집행위원이 미국 측 입장과 목표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회의장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EU 외교관들은 트럼프 정부 내 혼란 탓에 진정한 관세 정책과 협상 전술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에 전하기도 했다. 올로프 질 EU 대변인은 “미국 측 의견을 더 들어봐야 한다. 협상에서 미국이 선호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협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미국 측 기본 조건부터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상품에 대한 관세를 미·EU 간 철폐하는 상호 무관세 협정 ‘제로 포 제로’를 재차 제안했으나, 미국은 여전히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EU는 또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확대 방안도 제안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이를 관세 철폐 대안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결국 미국 측 관계자들은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대로 유럽연합에 20%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철강이나 자동차를 겨냥한 다른 관세도 완전히 철폐하진 않을 것이란 입장을 유지한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해온 디지털 규제, 식품 표준안 등에 대한 불만 사항도 작성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EU는 이에 대해선 보건과 식품, 안전 기준 및 기술과 디지털 시장에 적용되는 규정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레드라인’을 분명히 밝혔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 AFP연합뉴스
질 대변인은 “EU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제 미국이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이어 “모든 협상이 그렇듯 이 협상은 양방향이어야 한다. 양측 모두 무언가를 (협상 테이블에) 가져와야 한다”고 밝혔다. EU뿐 아니라 미국 측 양보도 필수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EU와 미국은 이번 협상에서 철강·알루미늄 산업의 글로벌 공급 과잉, 반도체·의약품 산업의 공급망 회복력 등 문제도 주요 현안으로 다룬 것으로 전해졌다. 철강·알루미늄 공급 과잉 문제는 양측 모두 우려를 표해온 중국의 과잉 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훗날 협상에서 미국은 해당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조치를 EU 측에 요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트럼프 정부가 향후 진행될 70여개국과의 상호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관세율을 낮춰주는 대가로 중국과 거래를 끊도록 압박해 중국 경제에 타격을 주겠다는 전략을 구상 중이라고 보도했다. 국가별로 관세 장벽을 낮춰주는 대신 중국이 해당 국가를 거쳐 상품을 운송하는 것을 막거나, 중국의 값싼 공산품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중국 경제를 고립하기 위한 조건을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EU는 협상을 이어가되 결렬되면 미뤄둔 보복 조치를 다시 발동하고 미국의 자동차 및 상호 관세 등에 대한 추가 보복 조치도 단행하겠다는 계획이다. EU는 앞서 미국의 철강·알루미늄 25% 관세에 대한 대응으로 이날부터 미국산 상품에 대해 첫 보복 조치를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지난주 미국의 상호 관세 90일 유예 결정에 따라 오는 7월14일까지 발동을 보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