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파면되기만 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12·3 내란부터 지난 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기까지 123일 동안 불면의 밤을 버텨왔는데도 바뀐 게 없다. 탄핵의 ‘약발’은 며칠 가지 못했다. 대통령 자격을 상실한 윤석열은 일주일을 관저에서 뭉개더니 마치 환영식에 나온 개선장군처럼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저로 돌아갔다. 주먹을 불끈 쥐고 지지자들을 향해 웃어 보이는 모습은 지난달 서울구치소 석방 장면을 빼다박았다.
“다 이기고 돌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5년 하나 3년 하나…” 자신의 처지를 망각해도 유분수지 파면당한 내란 우두머리의 초현실적 ‘정신승리’는 할 말을 잊게 만든다. 대체 누구를 이기고 돌아왔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건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아니면 모른 척한다)는 것이다. 불법 계엄에 대한 일말의 사과도, 반성도 없었다. 피고인 자격으로 선 형사법정에서는 공소사실은 물론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인정된 기본적 팩트까지 깡그리 부인했다.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라고 설파했다. 지금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 과거는 저물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윤석열 탄핵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위기다. 불법 계엄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은 퇴행의 역사였고, 이를 막아선 시민들의 용기가 민주주의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앞으로 직진하려는 정의는 다시 부조리 앞에 멈춰섰다.
윤석열은 무대 전면에서 퇴장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지핀 내란의 잔불은 아직 곳곳에서 타고 있다. 탄핵 정국의 권력 공백을 틈탄 ‘알박기 인사’가 대표적이다. 실낱같은 희망회로를 돌리며 어떻게 해서든 한 줌의 기득권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윤석열 측근이자 검찰주의자인 이완규를 헌재 재판관으로 지명했다. 제한적 권한 행사를 해야 할 ‘대행’이 계엄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인물을 재판관으로 지명하자 ‘헌법 파괴 행위’란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해 말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면서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고 했던 그가 불과 몇달 만에 돌변했다. ‘윤석열과의 교감설’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다.
‘이진숙 2인 체제’ 방통위는 법원이 잇따라 제동 거는데도 MBC 후배인 신동호 EBS 사장 임명을 강행했고, 다른 공공기관의 대표·이사·감사직 등을 두고도 ‘보은 인사’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충성심’과 정권과의 친소관계가 임명 기준이다. 탄핵심판 와중에 이뤄진 경찰 인사에서도 ‘친윤’이 대거 승진했다. 대통령기록관장에 용산 행정관 출신이 유력하게 물망에 올랐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심산이 아니고서는 뭐겠는가.
뿐만 아니다. 기세등등한 윤석열은 ‘상왕’ 행세를 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은 파면당한 내란 우두머리를 손절하기는커녕 앞다퉈 눈도장을 찍으러 찾아간다. 너도나도 ‘윤심 마케팅’을 앞세우며 그의 메신저를 자임한다. 대선 승리는 이미 물 건너갔으니 윤심을 등에 업고 지지자를 결집해 대선 이후 당권을 장악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이란 건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망상에 사로잡힌 극우세력은 가능성 0%인 ‘윤 어게인’을 외친다. 그러니 기고만장해진 형사 피의자 윤석열이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윤석열이 권좌에서 물러났는데도 그의 주변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내란 잔당’은 건재하다. 이들은 단순한 정치세력을 넘어, 체제 내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구조적 위협으로 작동하고 있다. 겉으로는 법치와 정의, 공정을 외치지만, 한편에선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이중적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들은 특정 인사 한 개인이 퇴장했다고 해서 한 방에 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사회 시스템에 깊이 뿌리내려 자리 잡았다. 관료 체제와 입법·사법 시스템 속에 스며들어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언제든지 민주주의를 흔들 태세다. 이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는 계속되는 갈등·불안과 함께 민주주의 위기를 맞을 것이다. ‘윤석열 이후’가 진짜 중요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조홍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