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케리안 플린, 케이티 페리, 로렌 산체스, 아이샤 보우, 게일 킹, 아만다 응우옌이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반혼의 발사장 우주비행을 마친 블루 오리진의 뉴 셰퍼드 NS-31 로켓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번 비행은 승객이 탑승한 11번째 비행이자 전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가 설립한 블루 오리진에서 처음으로 여성 승무원으로만 구성된 비행이다. EPA연합뉴스
과학, 특히 우주과학은 오랫동안 남성 학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소련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단독으로 우주에 간 1963년 이후 여성으로만 이뤄진 우주 비행은 없었는데요. 최근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우주 기업 ‘블루 오리진’이 유명인 6명의 ‘전원 여성’ 우주여행을 성공시켰습니다. 블루 오리진은 우주선 뉴 셰퍼드(NS-31)가 62년 만에 여성만 탑승한 우주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젊은 여성들에게 과학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홍보했어요.
하지만 일각에선 베이조스의 약혼녀인 로런 산체스, 유명 팝가수 케이티 페리 등 셀러브리티(유명인)로 구성된 ‘11분짜리’ 우주여행에 대해 비판이 나왔어요.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불평등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좀먹고 있는데, 기득권(거대 자본)과 기득권(셀럽)이 만나 ‘자원낭비’를 하고 있다는 게 주된 비판입니다.
미국 배우 겸 모델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는 틱톡에서 케이티 페리를 향해 “당신은 어머니 지구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회사가 제작하고 비용을 지불한 우주선에 탑승했다”고 했습니다. 페리가 우주선에서 내리면서 땅에 입을 맞추고 “어머니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걸 꼬집은 것이죠. 드라마 <뉴스룸>에 나온 배우 올리비아 먼도 한 방송에서 이번 우주여행을 두고 “우주로 가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드는데, 지금 계란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며 “우주 탐사는 지식을 넓히고 인류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우주에서 무엇을 해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했어요.
블루 오리진은 ‘여성’을 강조했지만, 정작 여성들은 이번 우주여행이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해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 항공우주국(NASA) 예산을 삭감하고 다양성 정책(DEI) 폐지에 나서는 상황이거든요. 이런 암울한 현실보다 일부 셀럽의 우주여행이 더 주목받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지요.
영국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모이라 도네건은 이번 여행이 “미국 페미니즘의 완전한 패배를 보여줬다”며 “이번 비행은 페미니즘의 승리이자 과학의 승리로 치켜세워졌지만 한때 과학 발전과 페미니즘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미국에 대한 일종의 장례식과 같았다”고 했어요. 그는 “우주는 이제 부유하고 자기애적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셀카를 위한 배경이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번 우주여행을 다녀온 6명 중 우주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은 2명에 불과해요. 여행에 참석한 셀럽들이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강조한 것을 두고도 ‘반여성주의적 비전 제시’였다는 지적이 나오죠.
트럼프 대통령 재선 이후 미국 페미니즘은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이 젠더 이슈를 삼켜버린 선거였다는 평가를 받아요. 여성의 권리보다 당장의 생계를 우선시하는 여성 유권자가 많았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반면 트럼프의 성차별적인 언동에 반발하며 비혼·비출산 등 ‘4B 운동’에 나서겠다는 여성들도 늘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두 현상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게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이건 성별 불평등이건, 미국 시민들이 ‘불평등’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불평등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칼럼에서 “4B 운동은 ‘사회적 결핍’에 대한 청년들의 저항”이라며 “그들이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미국 철학자 낸시 홈스트롬은 책 <자본주의와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가치관과는 매우 다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삶의 모든 영역을 상품화하고, 모든 것에는 가격이 있지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죠.
사회 대부분 영역에서 불평등이 심각한데, 불평등의 주요 원인제공자로 꼽히는 거대 자본이 ‘평등’의 외피만 활용해 ‘평등 워싱’에 나선 것. 블루 오리진 우주여행에 비판이 쏟아진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를 보더라도 입체적으로”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의 슬로건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이슈를 점(사실), 선(맥락), 면(관점)으로 분석해 입체적으로 보여드립니다. 주 3회(월·수·금) 하루 10분 <점선면>을 읽으면서 ‘생각의 근육’을 키워보세요.
<점선면>의 다른 뉴스레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을 눌러주세요! ▶ https://buly.kr/AEzwP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