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비상계엄같은 삶 사는 사람들 아직도…” ‘술집 여자’ 시민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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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부산 집회에서 ‘술집 여자’라고 스스로 밝히며 무대에서 발언했던 20대 후반 여성 김유진씨(가명)가 지난 15일 부산 여네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매일 비상계엄같은 삶 사는 사람들 아직도…” ‘술집 여자’ 시민의 호소

김유진씨(가명)는 지난해 12월11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 집회 무대에 올라 ‘나는 술집 여자’라며 말문을 뗐다. 그는 “우리는 윤석열을 탄핵할 것이지만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 뒤에도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며 “관심만이 약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지하철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가, 여성을 향한 데이트 폭력이, 성소수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일찌감치 탄핵 너머를 그린 김씨의 발언은 SNS 영상 등으로 퍼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약 4개월이 흐른 지난 4일, 한국 사회는 ‘고비’ 하나를 넘었다. 국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을 법에 따라 다시 파면해냈다. 한국 사회는 이제 김씨의 바람대로 소외된 시민들에게 빛을 비추고 있을까. 김씨를 지난 15일 부산 연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씨는 “나는 ‘관심’ 덕분에 살아남았다”며 “하루하루가 계엄과 다를 바 없는, 위기인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발 뻗고 잠들지 말아달라”고 다시 호소했다.

“관심만이 약자를 살려낼 수 있다”는 김씨의 호소는 경험에서 비롯했다. 김씨는 고등학교 시절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김씨의 보호자는 “너랑 못 살겠다”며 김씨를 때렸다.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잦았다. 김씨는 20살이 되자 집을 나와 ‘가출 청년’이 됐다. 집 밖에서 김씨를 살린 건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했다.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김씨는 “내가 만약 연결된 사람이 없고 고립됐다면 훨씬 더 위험했을 것”이라며 “나는 주변의 관심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부산 집회에서 ‘술집 여자’라고 스스로 밝히며 무대에서 발언했던 20대 후반 여성 김유진씨(가명)가 지난 15일 부산 여네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지난해 12월 부산 집회에서 ‘술집 여자’라고 스스로 밝히며 무대에서 발언했던 20대 후반 여성 김유진씨(가명)가 지난 15일 부산 여네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남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김씨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술집 여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강간당하지 않는 법, 피임하는 법 등을 공유했다. 일면식도 없는 이가 X(구 트위터) 메시지로 ‘자살하겠다’고 알리면 뜯어말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혼자 뛰어다니다 보니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김씨는 “혼자 애써서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며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정치, 제도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성소수자다. 소수자 친구도 많은 편이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탄핵 집회 무대에서 “매일매일이 계엄과 다를 바 없는, 위기인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니, 발 뻗고 잠들지 말아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적어도 굶어서, 위기로 내몰려서’ 죽는 사람은 없게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정치권에도 “민생의 ‘민’에 목소리를 내도 들리지 않는 시민들도 포함해달라”며 “가장자리에 내몰린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회, 주거·의료·교육·교통이 무상에 가까운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가 탄핵 집회 무대에 올라 ‘술집 여자’라 밝히겠다고 하자 주위 친구들은 걱정했다. 실제로 SNS에는 좋은 반응도 많았지만 ‘꾼을 시민으로 둔갑시켜서 무대에 올린 것 아니냐’ 비난도 많았다. 그러나 김씨는 그때 무대에 오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씨는 지금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고 있다. 탄핵 집회 영상이 알려진 뒤 한 시민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사회학과로 가서 사람을 위기로 내모는 구조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싶다”며 “이후 성노동자로서의 경험을 활용해 여성단체에서 일하며 피해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11일 김유진씨(가명) 발언 전문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저기 온천장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
‘너 같이 무식한 게 나대서 뭐 하냐’,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 같으냐’ 같은 말에 반박하고 싶어서, 또 많은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저를 경멸하거나 손가락질하실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 저는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이 자리에 용기내어 올라왔습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한 가지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건 우리가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정치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시켰고 또 윤석열을 탄핵시킬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국민의 절반은 박근혜와 윤석열을 뽑은 사람들입니다. 내 집값이 오른대서, 북한을 견제해야 해서,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추겨서 국민의 절반이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요? 강남에 땅이 있는 놈들은 그렇다 쳐도, 쥐뿔도 가진 것 없는 이삼십대 남성들과 노인들은 왜 국민의힘을 지지할까요?

그것은 시민의 교육 부재와 그들이 소속될 적절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우경화가 가속되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막지 못한다면 또 다른 윤석열이, 또 다른 박근혜가, 또 다른 전두환과 박정희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주십시오. 더불어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오로지 여러분의 관심만이 약자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저기 쿠팡에서는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주 용주골에선 재개발의 명목으로 창녀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동덕여대에서는 대학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고, 서울 지하철에는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가 보장되고 있지 않으며, 여성들을 향한 데이트 폭력이, 성소수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이주 노동자의 아이들이 받는 차별이, 그리고 전라도를 향한 지역혐오가,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것이 끝이고, 해결이고, 완성이라고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편안한 마음으로 두 발 뻗고 잠자리에 들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강한들 기자 handl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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