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스테디셀러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드림팀 11월 아르헨티나 공연 예정
이홍렬, 이윤미, 김영순 대표가 말하는 ‘만국공통’ 중장년의 고민과 해법

“남편이 밥 한 끼 제 손으로 차려 먹을 줄 모른다”는 푸념을 하면, 생판 모르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편이 되어주는 곳, 찜질방이다. 해외 관객에게 홍상수 감독 영화 속 소주가 ‘마시면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마법의 초록병’으로 불리듯, 이 연극의 배경이 되는 찜질방도 해외 관객에게는 또 하나의 K문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
6인의 중장년이 ‘찜질방’에 모여 삶의 고락을 나누는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가 오는 11월 아르헨티나에서 2주 동안 막을 올린다. 2013년 대학로 초연 이후 전국을 누비며 관객을 웃기고 울린 연극에 담긴 중장년의 감정과 경험은 지구 반대편까지 가닿았다. 중장년들의 고민은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닮아 있다.

삶의 고락, 동서고금 통한다
연극의 대본을 쓰고 연출한 극단 ‘나는세상’ 김영순 대표, 10년여간 ‘영호’ 역을 연기한 개그맨 이홍렬, 제작에도 참여한 ‘은정’ 역의 배우 이윤미가 한자리에 모여 그 보편적 정서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금 우리 부모, 형제, 그리고 나 자신이 겪는 우리네 현실이 담긴다. 딸아이네 집에 산바라지 간 아내가 전화를 거는 유일한 이유는 남편이 개밥을 챙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은퇴 후 고독한 노년을 보내는 영호는 찜질방에서 만난 ‘고개 숙인 중년’ 종수에게 평화로운 부부 생활을 위한 지혜를 전수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늙은 마누라야
홍렬 = 대본을 보면 전부 내 얘기, 우리 얘기예요. 어느 날 문득 아내 뒷모습을 보는데 ‘저 사람은 어디서 나타나서 39년째 내 밥을 하고 있을까’ 싶더라고요. 너무 고맙잖아요. 그런데 아내는 ‘저 사람은 어떻게 나를 39년째 먹여 살려주냐’라고 해요. 서로 감사하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잉꼬부부인 줄 알았던 은정은 알고 보니 남편의 불륜으로 속이 곪아가고 있다. 은정 역의 이윤미가 외도 상대에게 저렇게 외치는 순간 관객석에서는 어김없이 환호가 터진다. 관계가 틀어졌던 부부가 이 연극을 본 뒤 쌓아만 두었던 속내를 꺼내며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는 후기도 여럿이다.
윤미 = 그동안 답답했던 것들, 여자들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대신해 줘서 시원하다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아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해요.

내가 쓰던 중고품 너 줄게, 반품하지마!
극 초반 이윤미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해당 대사를 칠 때, 관객 대부분은 그의 실제 남편을 자동연상하며 묘한 재미를 느낀다. 지난해 감독판에 재방송될 정도로 명작으로 남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공주병’ 연기를 너무 잘한 나머지 그 낙인이 굳어질까 우려가 없지 않았던 이윤미가 굳이 은정 역을 맡은 건 극 중 ‘반전’에 매료되어서다. 그는 2006년 작곡가 겸 방송인 주영훈과 결혼해 15세, 11세, 7세 세 딸을 두고 있다.
윤미 = 친하게 지내다가 멀어지기도 하는 걸 ‘시절 인연’이라고도 하잖아요. 부부도 끈끈하다가도 부딪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인데 그 시기에 서로 다그치고 소리 지르기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해주려고 하면 낫지 않을까 해요. 기분 따라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하니까요.
화가 나더라도 당장에 풀기보다는 조금 묵히는 편이라는 그는 남편과는 그런 싸움의 리듬이 잘 맞아서 다행이라며 웃어 보였다. 얼마 전 작고한 시아버지가 꿈에 건장한 모습으로 나와서 마음이 놓였다고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한 중년의 안정감이 비쳤다.

한 애미는 열 자식을 키울 수 있어도, 열 자식은 한 애미를 봉양 못한다 했어.
연극을 집필한 김영순 대표는 유학 시절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영유아를 키우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엄마의 말>을 보고 공감대야말로 만국 공통어라는 걸 체감했다. 이후 한증막에서 우연히 듣게 된 ‘진짜’ 인생 수다에 영감을 받아 3개월간 찜질방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며느리에게 따귀를 맞은 시어머니의 사례는 실화에 기반했다. ‘현지처’ 같은 단어까지 난무하던 현실을 그나마 순화한 연극이다.
영순 = 돈 많으면 배우자의 바람으로 고민하고, 애들 키우는 집은 자식 문제, 아니면 시댁과의 갈등, 부부 불화 등 그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강남은 좀 다른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웃음), 다르지 않더라고요.
브리검영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뉴욕대에서 공연학 석사를 마친 김 대표는 각본 집필과 연출 외에도 영국 현지에서 본 연극을 번역해 한국에 들여와 무대에 올리고(<엄마들의 수다>) 단편영화 <당신의 자리에 서다>를 연출하는 등 전방위적 활동을 해왔다.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의 대본은 지난 10년간 조금씩 수정됐지만, 큰 틀만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유구한 ‘어른’들의 고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이홍렬이 “집 안의 모든 일을 AI 로봇이 하지 않는 한,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다 납득할 만한 문제”라고 거들었다.
“부모와 나, 나와 자식. 누구나 그 인간관계의 범주 안에 있거든요.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싸우기도 하고 자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또 위로를 받으며 그 시간을 견디죠. 아르헨티나 관계자가 한국에 와서 연극을 보고 공감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김영순 대표)

극단 ‘나는세상’ 제공
여섯 캐릭터가 만드는 촘촘한 ‘공감’ 그물망
영호, 은정, 종수 이외에도 손주를 돌보다 봉변당하는 영자, 사춘기 아들과 매일 전쟁을 치르는 미경, 그리고 잘 키운 자식들에게 용돈 안부나 받는 말복 6명의 캐릭터는 누구에게나 있는 고민을 응축한 현대인의 아픈 손가락이다. 관객들은 우리 집안 ‘웬수’를 대신 혼내주는 듯한 호통에 환호하고, ‘39금’쯤 되는 어른 유머에 박장대소하다가도 “우리 엄마한테 잘할 걸 그랬다”는 영자의 고백에는 눈물 바람을 한다.
100분간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연극은 통쾌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는 않는다. 김영순 대표는 희망을 심었다고 말했다. 종수는 위기의 중년을 통과할 기운을 얻는 듯하고, 미경은 사춘기 아들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며, 말복은 내 인생을 찾겠다고 선언한다. 기어코 독립을 결심한 은정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제는 입센의 <인형의 집>과는 다른 결말이어야 한다”는 게 연출자의 힌트다.
갖가지 한탄과 문제점이 무대에 오르지만, 이 연극은 직접적인 솔루션을 제시하지 않는다. 김 대표의 말마따나 “우리 일상은 어느 날 갑자기 확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연극을 보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볼 시간을 주고, 극장에 불이 켜지는 순간 각자 ‘열린 결말’을 향해 나아가게끔 다독인다.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의 포스터
이를 위해 6인의 배우는 모두 1인 2역을 맡았다. 1990년대 인기 코너 ‘귀곡산장’에서 감칠맛 나는 할머니 귀신 연기를 했던 이홍렬은 남편을 타박하는 종수의 아내 역할을 소화한다. 종수의 하소연만 들었던 관객은 비로소 아내의 입장이 되어본다. 중장년이라면 이 촘촘한 공감대의 그물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10대들조차 ‘내 얘기’라고 입을 모았다. 관객들이 ‘힐링 연극’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호는 종수의 미래이기도 해요. 은정이 남편의 불륜 상대 미스 김 역은 영자가 연기해요. 또 은정은 종수 엄마 역을 맡아요. 영자도 한때 젊은 시절이 있었고, 은정이도 미래의 할머니가 될 테니까요.”(김영순 대표)
김 대표는 “이홍렬이야말로 완벽한 영호”라고 극찬했다. 친구들 한둘씩 저승으로 앞세우고 찜질방을 오가는 ‘독거 노인’ 역할은 10년 전만 해도 조금 이른가 싶었는데, 한 해 한 해 연륜과 내공이 쌓이며 이제는 이홍렬의 필모그래피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 됐다.
“20~30년 전에 내가 있었잖아요. 그러나 20~30년 후에는 내가 없어요. 사람들은 그걸 자꾸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작품은 세월이 금방 간다는 걸 인식시켜 줍니다. 나중에 하겠다고 하면, 다 늦어요. 이 연극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바라보다 보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나는 벌써 10년째 150번 가까이 무대에 섰으니, 얼마나 잘 알겠어요(웃음).”(이홍렬)
이홍렬은 30년 이상 매년 가족사진을 찍는 ‘패밀리맨’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틈틈이 촬영해 둔 가족의 영상 데이터도 웬만한 방송국 못지않게 방대하다. 가족 리얼리티 예능이 넘쳐나면서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지만, 그는 가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거절하고 있다. 그에게 민폐를 끼칠까 조심스러워하는 가족 역시 그의 성정과 똑 닮았다. 유튜브 채널 이홍렬TV에도 “결혼 후 10년까지”로 아내의 허락을 받은 영상만 공개한다. 존중과 배려, 그리고 확고한 원칙을 지키는 가장의 위엄이야말로 잡음 없이 롱런하는 스타 이홍렬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극단 ‘나는세상’ 제공
공감대의 힘, ‘K연극’의 시대가 온다
이홍렬은 더 욕심낸다면, 오래전 공연차 자주 갔던 미주 지역 무대에 서고 싶다. “우리 또래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에게 이 작품을 꼭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마음 통하는 이들이 모였으니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간다. 이윤미는 뉴욕 공연까지 성사시키기 위해 팔 걷고 나섰다. 한국식 찜질방의 새로운 버전으로 소문난 현지 스파부터 공연장을 사전답사하는 등 ‘프로듀서’ 역할에도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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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60주년을 맞아 현지에서 공연되는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에스파냐어 자막이 붙는다는 것, 그리고 극 중 여자 배우들이 삶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부르는 ‘여자의 일생’을 아르헨티나 정서에 맞게 ‘서울 탱고’로 바꾸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지극히 한국적인 사연을 엮은 이 연극을 미리 관람한 아르헨티나 현지 관계자의 후기는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였다.
김영순 대표는 K팝, 최근 세계적으로 회자된 K민주주의에 이어 ‘K연극’이 세계적인 공감대를 기반으로 사랑받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