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대 학생들의 남녀 공학 전환 반대 투쟁 5개월
학생들 징계·형사고발한 학교에 맞서 시민들과 연대

지난 2월 9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 동덕빌딩 앞에서 열린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동덕여대 교화인 목화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주간경향] 동덕여대 학생들이 학교 측의 남녀 공학 전환 추진에 반대하며 투쟁을 벌인 지 5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학생들은 여전히 여자대학이 필요하다며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라고 요구했다. 학교 건물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고, 수업을 거부하며, 캠퍼스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주장은 좀처럼 공론화되지 못했다. 일부 누리꾼, 정치인, 언론이 ‘폭도’·‘젠더 갈등’ 프레임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학생들은 점점 고립돼갔다. 학생들은 혹여나 공격을 당할까 싶어 바깥에 말 한마디를 쉽게 할 수 없었고, 학교를 오갈 때 마스크를 써 얼굴을 가려야 했다.
지난 4월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두 명의 동덕여대 학생을 만나 그간의 일들을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투쟁을 했는지, 외부의 공격에 어떻게 버텼는지 등이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두 학생은 춥고 외로웠던 투쟁의 이야기를 이제 꺼낼 수 있다고 했다.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 광장에서 이어진 연대와 함께 동덕여대 학생들도 학교에서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는 지난해 11월의 구호는 이제 “목화는 밟힐지언정, 꺾이지 않는다”로 바뀐 채였다. 목화는 동덕여대의 교화다.
“소중한 여대, 갑자기 바꾼다니”
동덕여대 학생들이 학교 본관 건물을 점거한 것은 지난해 11월 11일이다. 학교의 남녀 공학 전환 검토 사실이 알려진 지 5일 만이었다. A씨(23)도 소식을 듣고 본관으로 향했다. A씨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했다. 2023년 한 학생이 학내에서 쓰레기 수거 트럭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지만 제대로 된 해결 없이 넘어간 게 이번 일로 이어지게 됐다는 부채감이 들었던 것이다.
A씨가 말했다. “저는 남녀 공학 전환 자체보다는 ‘또 학생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하네’ 같은 분노가 더 컸어요. 2023년에도 본관 점거를 했거든요. 그런데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못 갔어요. 사실은 안 간 거죠. 점점 관심이 떨어지고, 마지막엔 사람이 몇 명 안 남았다고 해요. 그렇게 해산됐어요. ‘또 그럴 수는 없다’ 싶어서 이번엔 나간 거예요. 고학번들은 이런 부채감이 다들 있을 거예요. 후배들에게 반민주적인 탄압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월곡캠퍼스 운동장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B씨(20)는 여대이기 때문에 동덕여대에 왔는데 갑작스레 남녀 공학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에 화가 나 투쟁에 참여했다. B씨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여대가 얼마나 안전한지 잘 인지하고 있었다”며 “그래서 여대에 왔고, 여대의 학우들이 소중했다”고 했다. B씨는 “사회에서 성폭력·성희롱이 잘 처리되지 않는데 남학우가 왔을 때 학교가 이런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며 “사랑하는 학우들이 위험에 처하길 바라지 않았고,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고 했다.
학생들은 본관 건물 바닥에 깔개를 깔고 앉았다. 누군가가 사다놓은 라면이나 김밥, 컵밥 같은 것을 먹으며 숙식을 했다. 농성을 하면서 A씨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고 했다.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딱 일주일 정도였다. 투쟁의 이유보다는 젠더 갈등에 초점을 맞춘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A씨의 말이다. “저희도 올라오는 기사를 보잖아요. 저희가 말한 대로 들어가지 않고, 자극적이거나 젠더 갈등 프레임을 씌우는 방향으로 기사가 나가니까 학생들이 많이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한 친구가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제발 잘 부탁드린다’고 하면서 손을 막 떨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그게 참…. 말한 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정말 상처였어요. 다른 학생들에게도, 저에게도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고 점점 외부와 차단한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A씨는 우울한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일부러 다른 학생들에게 말을 걸거나 과자·담요를 주곤 했다. 그는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위로가 있지 않느냐”며 “혼자 있으면 힘드니까 본관으로 오라고 했다”고 했다.
공격받는 학생들, 침묵한 학교
동덕여대 학생들에 대한 공격 수위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주로 보수진영 정치인들이 기름을 붓고 반여성단체와 유튜버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합리적 비판을 넘는 신상털이, 조롱, 비난, 욕설이 쏟아졌다. A씨는 “유튜버들이 새벽에 본관으로 쳐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B씨는 악플을 찾아보면서 우울함에 빠졌다고 했다. 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누리꾼이 칼부림 예고글까지 올린 상황에서 자신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볼 수밖에 없었다. B씨가 말했다. “하루가 지나면 욕이 더 늘어나 있었어요. 뉴스 하나가 떴는데 똥덕이라느니 폭도라느니 그런 말들이 있고, 다른 유튜브를 보면 또 그런 말이 있고. 너무 힘들어서 학생들만 있는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거기에선 우리끼리라도 좋은 댓글 남기자고 계속 글이 올라오니 도망칠 수 없었죠. 그러다 보면 우울해져서 아침이 안 오기를 빈 적도 있어요. 일상생활이 안 됐고 이틀 내내 굶어서 못 움직인 적도 있었어요.”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민주없는 민주동덕’이 주최한 동덕여대 연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학생들에 대한 보호조치는 별달리 이뤄진 게 없다. 학교는 불법 시위의 잘못과 책임은 학생들에게 있다고 했다. 총학생회가 학생들에 대한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학교 측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학교는 학생들을 징계에 회부하고 형사고소했다. 학교 측의 조치 대상이 된 학생 규모는 40~50명으로 추산된다. B씨는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당시 여론에서 우위를 점했던 허위사실과 저급한 여론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장애인들의 지하철 선전전, 기후활동가들의 스프레이 시위.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에는 자주 ‘폭력 딱지’가 붙는다. 업무방해죄 같은 범죄로 엮고, ‘손배 폭탄’ 위협이 뒤따른다.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임미리 사회학 박사는 “1980~1990년대 학생시위가 많았지만, 폭력 시위로 몰아가거나 학교가 학생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은 없었다”며 “(동덕여대 사태는) 학생운동이 약화되면서 힘의 균형에서 (학생들이 학교에) 밀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분석했다. 임 박사는 “학생은 학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구성원이고 학생 등록금으로 학교가 운영된다”며 “학교의 주인이 학생인데 소송을 건다는 게 말이 되느냐. (래커 시위도) 학교의 한 역사이고, 그것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를 못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계엄 후 시작된 외부와의 연대
투쟁 구심점이었던 총학생회가 임기 만료로 해산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난해 12월 학생들의 자발적 모임으로 재학생연합이 만들어졌다. 이어 학교와 거리에서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 총장직선제 도입 등 민주 절차 확립, 남녀공학 전환에 대한 의견 수렴을 학교 측에 요구했다.
12·3 비상계엄은 시민들과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광장에 동덕여대 학생들이 ‘민주동덕’ 깃발을 들고나왔고, 시민들은 지지를 표현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지난 1월 2일 신년투쟁으로 동덕여대 혜화캠퍼스로 행진했고, 지난 3월 3일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는 동덕여대 투쟁에 대한 지지 성명을 냈다. 지난 2월 9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동덕빌딩 앞에서 열린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집회엔 다양한 투쟁 현장의 시민들이 참여해 동덕여대 학생들과 연대했다.

지난 2월 9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 동덕빌딩 앞에서 열린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동덕여대 교화인 목화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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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는 “계속 고립돼 있었고, 안 좋은 반응만 봤는데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며 “같은 의제로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고 했다. B씨는 “‘장애인 이동권이 동덕여대랑 무슨 관련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많은 부분이 맞닿아 있고 닮아 있었다”며 “연대의 과정이 즐겁고 저 개인적으로도 가장 크고 좋은 변화였다”고 했다. A씨도 “연대의 힘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며 “12월까지는 거의 고립된 상태였다가 외부 연대를 받으면서 풀려났는데 극적인 변화였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두 학생에게 “민주동덕에 봄은 올까요?”라고 물었다. A씨는 “이미 봄은 오고 있다. 연대라는 의미의 봄”이라고 답했다. A씨는 “정말 추웠고, 고립돼 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외부의 연대를 받아 나아가고 있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B씨도 말했다. “더 큰 승리를 위해 항상 큰 실패가 수반된다고 생각해요. 래커칠이 너무 폭력적이라서 욕먹은 것을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어떤 여대는 더 나은 전략을 세울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남들의 어떤 성공이에요. 봄은 어디 한 부분에만 오는 게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