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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 잊은 시대, ‘김장하 열풍’이 다시 부는 이유

경남 진주 지역사회에 크고 작은 기부를 이어온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시네마달 제공

경남 진주 지역사회에 크고 작은 기부를 이어온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시네마달 제공

보기 드문 ‘어른’의 이야기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경남 진주 지역사회에 크고 작은 기부를 이어온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81)이 실천해온 나눔의 삶이 조명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요지를 낭독한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60)이 ‘김장하 장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다. 그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2023)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역주행하고 있고, 출판계에도 김장하 열풍이 풀고 있다.

김 전 이사장은 경남 사천·진주에서 60년 가까이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을 사회 곳곳에 아낌없이 기부한 인물이다. 1983년 설립한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했고, 형평 운동·지역 언론·여성 인권 등 다양한 분야를 후원했다. 가난으로 중학교 이후 학업을 잇지 못했던 그는 한약방으로 부를 일군 뒤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손수 지원했다.

2019년 4월9일 문형배 당시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과의 인연을 말하고 있다. <어른 김장하> 재개봉 예고편 갈무리

2019년 4월9일 문형배 당시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과의 인연을 말하고 있다. <어른 김장하> 재개봉 예고편 갈무리

김장하 장학생 중 한 명인 문 전 권한대행은 <어른 김장하>에 두 차례 등장한다. 경남 진주대아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김 전 이사장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2019년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문 전 권한대행은 이 사실을 밝혔다.

다큐멘터리는 2019년 김 전 이사장의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한 문 전 권한대행이 감사를 표하다가 눈물에 목이 메는 장면을 포착한다.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사법시험 합격 후 찾은 자리에서 김 전 이사장이 그에게 했다는 말이다. 문 전 권한대행은 이 일화를 전하며 “제가 (사회에) 조금의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이사장이 특별한 건, 그의 선행이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는 데 있다. 김 전 이사장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과 김현지 MBC경남 PD의 공동취재로 완성된 <어른 김장하>에는 두 사람이 무작정 한약방을 찾고, 거절당하고, 대신 주변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다시 한약방을 찾으며 듣게 된 숨은 선행들이 조각보처럼 담겼다.

경남 진주 한약방에서 전화를 받는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좌) 앞에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전 편집국장(우)이 앉아 있다. 시네마달 제공

경남 진주 한약방에서 전화를 받는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좌) 앞에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전 편집국장(우)이 앉아 있다. 시네마달 제공

김 전 이사장은 제 입으로 무용담을 떠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선 돈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한약업사인 그는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해서 돈을 벌었다”며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그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했을 수도 있지만,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 사회에 환원”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후원을 받은 수많은 이들은 “김장하 선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비상계엄을 무기로 휘두른 윤석열이 탄핵당하고도 사과는커녕 재판정에서 장광설을 펼치는 시대다. 이때 다시 부는 김장하 열풍은 ‘부끄러움을 아는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 4일 대통령 탄핵 이후 OTT에서 시청 순위가 역주행한 다큐멘터리는 20일 넷플릭스에서 국내 상위 10위 시리즈 중 8위를 기록하고 있다.

극장가도 영화판을 재개봉했다.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202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은 것에 이어, 그 영화 버전이 2년 뒤 재개봉하는 것은 이례적인 성취다. 지난 10일 CJ CGV를 시작으로 전국 멀티플렉스와 독립예술극장에 재개봉관이 늘고 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어른 김장하>는 지난 18일과 19일, 한국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줬으면 그만이지>(김주완 지음) 표지. 교보문고 갈무리

<줬으면 그만이지>(김주완 지음) 표지. 교보문고 갈무리

출판계에도 김장하 열풍은 불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김 전 편집국장이 김 전 이사장의 생애를 책으로 엮은 <줬으면 그만이지>(2023)는 4월3주(10일~16일)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5위로 올라섰다. 오는 30일에는 김 PD가 쓴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 각본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김 전 이사장은 2022년 5월31일 한약방을 닫았으나, 한약방 건물을 매입한 진주시는 올해 ‘진주 남성당 교육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1층은 한약방의 원형을 살리고, 2·3층은 진주의 ‘형평운동’ 등을 알리는 전시 및 시민 프로그램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이 모든 관심에도, 김 전 이사장은 특별한 외부 활동 없이 평범한 개인으로 지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인물이 지탱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무명으로 선행을 실천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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