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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위해 투쟁하라

때 이른 선거의 계절이 찾아왔다.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TV 토론과 지역 유세 열기가 뜨겁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조용하고 차가운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살인기업은 어디인가요?”를 묻는 시민 투표다.

4월28일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날’을 기념해 노동건강연대, 매일노동뉴스, 민주노총은 2006년부터 매년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진행해왔다. 산재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유서 깊은 행사이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으면서 ‘왕중왕’을 뽑는 투표를 하게 된 것이다. 엄선된 아홉 후보 중에서 두 곳에만 투표를 할 수 있다.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업종별로도 제련소와 중공업 같은 전통 제조업에서부터 반도체 생산 같은 첨단 제조업, 건설업, 플랫폼 유통업체까지 골고루 포진한 가운데 후보들의 이력이 워낙 화려해서 선택이 쉽지 않았다. 경쟁에 밀려 안타깝게(!) 후보에 오르지 못한 과거 수상자들의 이름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결과 발표와 기자회견, 사진전 등의 행사 준비 상황을 공유하던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 대화방에 급작스러운 부고가 전해졌다.

2015~2016년 메탄올 중독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이진희씨가 지난 17일에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1987년생, 그녀는 아직 30대 후반이다.

경남이 고향인 고인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중퇴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김치공장, 편의점, 식당, 전단지 배포 등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2015년 친구가 있는 인천으로 올라와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다 마지막 실습을 앞두고 다시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2016년 2월11일 드림아웃소싱이라는 파견업체의 소개로 인천남동공단에 위치한 BK테크라는 스마트폰 제조 하청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근무한 지 5일 만에 메탄올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다 겨우 깨어났다.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뇌병변으로 인한 장애도 남겨졌다.

기업의 무책임과 정부의 실패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었다. 고인의 사건 발생 한 달 전인 1월16일과 22일, 인근 다른 스마트폰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 두 명이 메탄올에 급성 중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가 너무도 명확하고 심각했기에 사건 발생 한 달도 되지 않은 2월15일에 이들의 산재는 초고속 승인됐다. 알고 보니 이미 2015년 12월30일에 또 다른 스마트폰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도 메탄올 중독으로 산재를 신청한 상태였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노동부는 1월25일부터 유사 사업장 8개소에 근로감독을, 2월1일부터는 메탄올 취급 관리 상태가 우려되는 전국의 사업장 3100여곳에 일제 점검을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 승인 절차가 진행되고, 비슷한 사업장들에 대한 관리·감독이 한창이던 바로 그 시점에 고인은 메탄올에 중독됐다. “출근하는 길에 버스 번호가 안 보이고 간판이 안 보이고” 하는데도 기어이 출근해서 야간근무를 하며 삶을 꾸려가려던 성실한 20대 청년에게 기업과 정부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고인은 최근 운동을 열심히 하며 건강도 다소 회복하고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계획도 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거제도로 떠나기로 한 그날 아침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떠나갔다. 2016년 말 노동건강연대가 작성한 사건 조사보고서에 고인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요, 누가 보게 될까요? 아무도 안 볼 것 같아요. 욕을 해도 돼요? 하. 웃음밖에 안 나온다 진짜, 왜 우리나라는 왜 이럴까 진짜, 할 말이 없다 진짜. 나 진짜 따지러 가고 싶다 진짜. 할 말도 없다 진짜.” 우리가 남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보고 있다. 욕을 하고, 따지고, 싸우는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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