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악마의 정치](https://img.khan.co.kr/news/2025/04/22/l_2025042301000655300067612.jpg)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령으로 촉발된 내란 사태는 7개월 만인 6월3일 대통령 선거로 일단 종결된다. 그러나 내란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라 결코 방심할 수 없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함께 들린다. 이미 각 당은 대선 후보 경선에 들어갔고, 이에 따른 선거 분위기도 점차 달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경선 후보는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고 있지만, 국민의힘 후보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국민의힘 경선 후보들은 모두가 ‘이재명은 절대 안 된다’면서 자신만이 그와 승부를 겨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선거전이 시작되면 이재명에 대한 단순한 정치적 비난의 도를 넘어 악마화하는 선동과 선전의 양상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 경쟁자를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악마로 묘사해 공격하는 정치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이와 관련해 나치 독일의 최고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그의 책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지만, 자신의 적을 오로지 악마화한다면 그는 정치적인 반대자가 아니라 이미 말살시켜야만 하는 비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된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반대자를 정당한 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절대 악으로 보는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의미의 적은 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적인 의미에서 적이며, 만약 이러한 적이 없다면 정치는 무미건조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 투쟁에서 흔히 있는 정치적인 반대자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묻지 않고 ‘전과 4범’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현재 진행 중인 다섯 재판 때문에 이재명을 따라다니는 ‘범죄자’라는 꼬리표는 그에게 흉악범이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있다. 그에게 쏟아지는 많은 비난 중에는 “우리가 이재명을 악마화한 것이 아니라, 악마가 이미 이재명 속으로 들어갔다”면서 악마화를 정당화하는 소리도 들린다. 아마도 악마가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는 <누가복음> 한 구절을 원용하는 것 같다.
이재명과 그 주변에 악마의 딱지
정치적인 형상으로서 악마는 그저 은유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고 정치의 구조 전체를 겨냥하기 마련이다. 이재명이 결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확신은 개인을 단순히 악마화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이재명의 배경이 되는 모든 정치적 이념과 조직에도 ‘종북 반국가 세력’ ‘반미 세력’이나 ‘종북 친중 세력’이라는 악마의 딱지를 붙인다.
악마라는 개념은 히브리어의 ‘사탄’, 이를 그리스어로 옮긴 ‘디아볼로스’에 뿌리를 둔다. 이 개념은 원래 신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검증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지녔고, 또 인격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이를 ‘타락한 천사’로서 신에 반항하고 사람을 죄와 타락으로 유인하고 신이 창조한 질서를 파괴하는 인격체처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악마의 이해 방식은 중세에 있었던 마녀사냥이나 이단자 화형이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처럼 절대 악의 인격체인 악마, 그리고 이와 싸우는 천사 사이의 적대적인 대립 관계가 아니라, 가령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서 우주적인 질서를 파악했다. 음은 결코 사악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은 지옥과 천당이나 악마와 천사의 관계가 아니라 밤과 낮, 겨울과 여름,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또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귀신·악귀·요괴와 같은 개념도 기독교적인 전통 속에서 이해하는, 인간을 타락의 세계로 유혹하고 파괴하는 절대 악으로서의 악마와 다르다. 굿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도 가능한 존재로서 여긴다.
기독교 악마의 개념과 비교적 가까운 마라(魔羅)라는 개념이 불교에 있다. 부처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는 것을 훼방하는 존재이자 중생을 감각적 쾌락과 죄악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존재다. 그러나 사탄처럼 인간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만(我慢)처럼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에서 보이는 악마 또는 이와 비슷한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나는 이런 차이에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대결의 전제이자 동시에 이의 결과물인 악마에 대한 생각이나 신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이와 관련해 먼저 기독교 근본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로지 선과 악 사이의 불가피한 투쟁의 현장으로 보는 미국발 근본주의가 한국에 상륙한 이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전도사들도, 또 세계 최대의 복음교회를 이끄는 목사들도 꾸준히 악마들을 지목해 왔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물론 동성애자, 성소수자, 여성주의자, 불교 신자, 무신론자 등 여러 이름을 가진 악마였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모든 정치 생활의 지침이라는 근본주의적인 확신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든 ‘아스팔트 보수’는 거리에 나서서, 파면된 윤석열이 핍박받고 있는 예수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종교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해보면 이의 본질은 간단하다. 한국전쟁의 경험과 이에 따른 강력한 반공주의, 개발독재를 통한 경제 성장이 낳은 사회적 갈등의 심화, 그리고 전통적인 믿음의 체계와의 경쟁은 한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어느 나라보다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었다고까지 자부하기도 한다.
악마를 척결한다는 ‘12·3 담화문’
헌재 앞에서 ‘국민의힘 기독인회’가 주최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이미 승려직을 박탈당한 한 승려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구호와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반공주의가 그 외연을 이제 불교까지 확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임제(臨濟) 선사의 유명한 법문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라’(逢佛殺佛)를 빨갱이를 만나면 죽여도 된다는 식으로 제멋대로 읽었다.
이런 증오의 언어는 우리 역사에서는 결코 말로 끝나지 않았다. 남북 분단 이후,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고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는가.
여기서 나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1942~)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원래 ‘신성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추방된 사람’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범죄 때문에 공민권이 박탈당해 누구든지 이 인간을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고 제물로서도 바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했다.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배제된, 단지 생물학적 의미의 인간이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빨갱이는 이런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였다. 악마와 같은 존재이기에 죽여도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다는 ‘유죄불벌’(有罪不罰)이 통하는 세상이었다. 문제는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수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주 제한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방증하는 엄청난 사태를 최근 경험했다.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문은 악마와 같은 존재를 국가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라, 예외적인 상태를 선언하고 이를 통해 척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발표를 보면서 “차가운 영혼, 떠벌리는 자, 눈먼 자, 주정뱅이는 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두려움을 알지만 이를 제어하고, 파멸을 보지만 자존심을 지닌 자가 가슴에 남는다. 파멸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독수리의 발톱으로 이를 움켜쥐는 자는 용기를 지닌 자다”라고 주장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악마를 위한 변명을 떠올렸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독선과 위선을 고발했던, 깨어난 시민은 오는 대선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