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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에 스며든 민주주의 “죄송합니다”

나라가 대체로 평온하다.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키고 나라가 쪼개질 듯이 패를 나눠 싸웠지만 을사년 봄은 그런대로 화사하다. 과거에는 지배자의 흉기였던 헌법도 민주주의 성곽으로 튼실하다. 초헌법적인 왕을 꿈꾸던 자는 거꾸러졌다. 세계의 시선도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폭주에 항의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미국 시민들도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분명 특별함이 있다. 그 특별함에 들어있는 피와 눈물 또한 특별하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이른바 자생적 민주주의 국가이다. “중국은 아직 ‘못하고’ 있고, 인도는 영국에게 ‘배워서’ 하고, 일본은 패전 후 맥아더 장군이 ‘시켜서’ 하고 있다.”(김대중) 세계가 한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단시일에 이뤄낸 나라라고 상찬한다. 하지만 단시일에 가난을 물리치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은 엄청난 일이었다. ‘역사적인 일’들이 끊이지 않았고 희생이 뒤따랐다. 우리 현대사의 압축 성장에는 민초들의 피눈물이 스며 있다.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를 성취했다. 의롭게 싸운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고 그들이 일궈낸 민주주의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 민주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검찰 출신 윤석열이 느닷없이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

윤석열이 지난 21일 내란수괴 혐의로 법정에 섰다. 내란이 일어난 그날, 국회로 난입했던 계엄군 지휘관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12월3일 어느 한 곳에서라도 총성이 울렸다면 대한민국은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히 병사들은 계엄 시늉만 내다가 철수했다.

지휘관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명료했다.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군에게 명령은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지만 (그 명령은) 반드시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설명이 아니라 경구였다. (공권력을 사적 용도로 휘두른 윤석열은 법정에서 시종 졸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병사들은 군부독재에 부역했던 과거의 군인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윤석열 측은 조 단장을 향해 회유를 시도했다. “원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는 것 아닌가.” 이에 조 단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특정한 기억은 점점 더 도드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엄령을 받들고 총기를 잡던 비장한 순간을 어찌 잊을 것인가. 그는 부하들을 향해 시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병사들의 총구에, 방아쇠에 민주주의가 들어있었다. 국회에 투입된 병력이 철수할 때 어느 병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김형기 특수전사령부 특전대대장은 윤석열을 강골 검사로 각인시키며 일약 스타로 만든 유명한 말을 면전에서 돌려주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또 모든 잘못을 부하들에게 떠넘긴 내란의 수괴 앞에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부하들은 아무것도 안 했고 그 덕분에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고 단언했다. 윤석열을 향한 포효였다. 그럼에도 김 대대장은 마지막 진술의 마지막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느덧 제 나이가 마흔셋, 군 생활 23년 차가 되었다. 23년의 군 생활 동안 과거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게 한 가지가 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전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조직에 충성해왔고, 그 조직은 제게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차라리 저를 항명죄로 처벌해달라. 그러면 제 부하들은 항명도, 내란도 아니게 될 것이다. 제 부하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 끝으로 우리 군이 다시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게끔 제 뒤에 앉아 계신 분들께서 철저하게, 날카롭게 혹은 질책과 비난을 통해서 우리 군을 감시해달라. 그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하다.”

민주주의를 지킨 의로운 군인들이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 김 대대장은 통수권자의 잘못까지 대신 빌고 있다.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대통령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광란의 칼춤을 막아낸 현명한 군인들이 있었다. 김 대대장 말대로 군대 뒤에는 국민과 언론이 있다. 군이 정치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게 살펴야 할 것이다. 법정 소식이 정의롭고 따뜻해서 봄이 ‘제대로’ 왔음을 실감한다. 은연중에 군을 무조건 명령에만 복종하는 무지성의 집단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미안합니다!

김택근 시인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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