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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알게 되는 것

지난주에는 퇴근길에 차가 막혔다. 일 년에 한 번, 벚꽃이 만개할 때 겪는 일이다. 만경강의 벚꽃을 보려고 몰려든 이들이 차창을 열고 천천히 달렸다.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벚나무 아래 해사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나. 그 길에서 조급한 건 꽃잎뿐이었다. 왜 그리 빨리 떨어지는지…

오늘 아침에는 한산해진 벚나무 길을 걸었다. 주말 비와 함께 인파는 물러났고, 연둣빛 잎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들은 동네 할머니들 차지가 됐다. 할머니들은 꽃잎을 반쯤 떨군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자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셨다. 급히 갈 이유가 없으니까. 살다 보면 ‘천천히’ ‘가만히’ 같은 부사가 어울리는 시간이 오는 듯하다. 나는 그런 노년을 기다린다.

길에서 이웃 할머니를 만났다. 저만치 걸어오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멈춰 몸을 작게 웅크리셨다. 어디 불편하신가 여쭈었더니, 조용히 고갯짓으로 바닥을 가리키신다. 거기, 봄이 한 움큼 있다. 자잘하게 예쁜 꽃들과 쑥이다. 내가 아는 할머니들은 모두 미물의 천재다. 작고 예쁘고 쓸모 있는 것들을 단박에 알아보신다. 여리고 푸른 것들 사이에서 빨간 점퍼를 입은 할머니가 참 고왔다. 거기서 제일 큰 꽃 같았다. 하지만 “꽃처럼 예쁘시다”는 말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신다.

“어디가 꽃이냐, 거무죽죽한 흙이지.”

할머니의 투박한 대답이다. 그러고 보니 흙을 닮은 것도 같다. 붉고, 따뜻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봄의 흙. 식물은 잘 다져진 흙에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운다. 그러니 흙을 닮은 얼굴에는 새싹의 푸릇함과 잘 자란 식물의 고아함, 피어난 꽃의 화사함이 모두 담겨 있지 않겠는가. 그 얼굴은 하나의 풍경에 가깝다. 아끼는 것을 품고, 돌보고, 길러낸 사람이 제 몸에 새긴 풍경.

오래전에 지중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국적보다 그 고장의 색과 향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고 했다. 나는 그와 화가 마티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중해의 기후는 그림자와 빛의 경계를 뚜렷이 드러내고 마티스는 그 특징을 선, 분할, 색으로 표현했다. 화가의 색이 명료했던 이유도 지중해의 빛, 날씨, 그곳의 단순한 삶 덕분이었다. 그는 마티스의 그림이 화가가 지중해에 보낸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했다. 어떤 장소를 사랑하면 우리 안에 그곳이 새겨지는 법이라고.

이웃 할머니를 따라 뜯어온 쑥을 넣고 된장국을 끓였다. 벚꽃보다 짙은 봄 내음이 집 안에 퍼진다. 국을 한 그릇 듬뿍 퍼서 식탁 위에 올린다. 쑥국을 좋아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 얼굴에는 어떤 풍경이 새겨져 있었던가. 봄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온종일 마당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화단에 핀 꽃과 세발자전거, 작은 신발을 신고 걷던 나. 그가 본 풍경은 그런 것이었을 테다. 내가 넘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바라보던 그 눈에 나는 하나의 세계처럼, 장소처럼 담겼을 것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가 많이 닮았다는 것도.

4월에 눈이 내리는가 싶어 창밖을 보았다. 꽃잎이다. 꽃비가 내린다. 내 얼굴에 어떤 풍경이 새겨질지 알 것 같다. 봄의 흙이 아름답다는 것과 또 누군가에게 내가 꽃처럼 피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봄에는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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