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꿈과 집(‘물꿈집’ 전시명을 변용) ⓒ이훤
헤엄을 무서워하는 뒤통수가 보인다. 뛰어드는 자세를 취했다가 허리를 이내 곧추세운다. 망설이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저건 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강을 향해 몸을 던진다.
수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제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인간을 들일 때도, 강은 울린다. 첫 진동은 더 작은 파동으로 이어진다. 강의 먼 데까지 한 인간의 존재가 닿는다.
물속에서 눈을 뜬다. 시야가 흐릿하지만 거기에는 얇고 정교한 케이크처럼 시간이 쌓여 있다.
뛰어든 자는 거기서 자신이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산업단지를 본다. 잠영해서 가까이 간다. 눈을 감았다 뜨면 허름한 아파트가 보이고 머리가 짧은 애들이 보인다. 모래가 흩날린다. 눈꺼풀을 닫았다 열었더니, 비행기 소리가 난다. 공항으로 혼자 향하던 시절 맡았던 탈취제 향이 난다. 떠나는 사람들의 냄새다. 물 밑에 있어본 자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탄로 난다.
물에 들어서면 세계가 뒤섞인다. 시간이 뒤집힌다. 그래서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은 물가로 향하기도 한다. 이따금 재편되고 싶다. 아주 작은 인간의 질량만으로 몸이 다시 정렬되는 강처럼. 완전히 새로워지고 싶다. 나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품을 전부 교체하고 싶다. 삶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는 걸 수천 번 학습한 비행기처럼. 돌아와야만 경신될 수 있는 기체처럼.
어떻게 하면 나를 통과한 사건과 시간이 고스란히 우리가 될까. 우리는 어떻게 풍경이 될까. 눈을 떴다 감는다.
헤엄과 이륙은 닮은 데가 있다. 물속의 나와 육지의 몸은 너무 달라 잠시 끊어진 것 같다. 공중에 떠오르는 짧은 순간 비슷한 상태에 놓인다. 세계와 우리 사이의 틈을 몸으로 느낀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생생하게 분절된다. 나는 이것이 내가 나와 공존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이륙을 다 이름 짓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자기를 빚는다. 그 풍경이 들어설 강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륙은 어떻게 매번 새로운가. 이륙은 정말 매번 새롭나? 어쩌면 우리는 다시 착륙할 거다.
어떻게, 자신을 그대로 옮겨놓은 사람처럼 매번 말하고 쓰나요? 전시 ‘물꿈집’을 관람하고 차지량 작가에게 그리 물을 뻔했다. 한 사람이 지은 물과 꿈과 집에서 나서자 긴 시간 잠영하다 빠져나온 물도마뱀의 기분이었다. 날아다니던 것들이 머리 위로 후두두 떨어진다. 종잇장처럼 시간이 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