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무디다 마노즈(왼쪽), 방글라데시 국적 이주노동자 압둘 라티프가 지난 15일 울산광역시 북구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체류허가 신청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2022년 여름, 비좁은 철제 케이지에 자신을 가둔 조선소 하청노동자 유최안씨의 외침을 기억하시나요? 하청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파업을 벌였지만 조선소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숙련 노동자들은 낮은 처우를 견디다 못해 떠났고, 이주노동자가 그 빈자리를 채웠죠.
그런데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약속한 노동조건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사람이 급할 땐 손 벌려 놓고 정작 입국 후엔 나 몰라라 하는 행태. ‘취업사기’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일방적인 계약 해지 등으로 갈 곳을 잃기도 하고, 임금도 최저임금 수준으로 후려치기를 당하고 있어요. 식비 등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이뤄지는 부당한 공제, 이면계약 등 각종 꼼수가 만연합니다. 문제는 이 임금이 애초 한국 정부가 약속한 것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이슈를 자세히 보려면 정부가 왜 조선업에 이주노동자들을 대거 들여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조선업은 10년째 불황을 겪다가 최근 호황을 맞았어요. 그런데 하청노동자 임금은 10년 전 불황기에 삭감된 임금 그대로였습니다. 조선소 생산 대부분을 담당하는 숙련공 하청노동자들은 불만이 컸습니다. 유최안씨처럼 파업으로 항의한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숙련공이 결국 조선소를 떠났습니다. 육지의 다른 일자리에 가면 같은 노동강도와 기술로 훨씬 ‘현실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노동계는 조선소 노동조건을 개선해 숙련공 하청노동자들이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와 조선업계는 처우개선을 거의 하지 않고 이주노동자들로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숙련도가 중요한 조선업 특성상 기술인력을 대상으로 발급되는 ‘E7 비자’ 이주노동자를 대거 데려왔습니다. E7 비자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총소득(GNI) 80% 수준’의 임금을 보장한다는 것인데요. 계산해보면 월 27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의 통장에는 최저임금 수준인 206만원이 찍혀 있었습니다. 경향신문은 2023년에도 기획 기사를 통해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는데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법무부는 지난 1일 시행령을 개정해 ‘GNI 80%’인 임금수준을 ‘최저임금(월 209만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업체들이 꼼수를 부리지 않고도 임금을 깎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스리랑카 출신 무디다 마노즈씨는 “스리랑카 설날인데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지 못했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끌어내립니다. 조선소에서는 <쇳밥일지> 저자인 청년 용접공 천현우씨도, 16년차 숙련공도 똑같이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습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면 그 일자리는 최저임금 부근에 머무는 일자리가 되고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니까 미등록 이주민도 늘어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유최안씨와 함께 파업했던 김형수 한화오션 하청노조 위원장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한화 본사 앞에서 4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권은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들은 사업장을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낮은 처우와 인권침해를 견디거나, 도망쳐 ‘미등록 체류’ 신세로 내몰립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앞장서 보호하기는커녕 강제단속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식당 개업식이나 출근 버스 같은 일상공간에서도 단속이 이뤄지고 있고요. 폭력적 단속으로 중상을 입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부의 이 같은 대응은 사회의 혐오와 편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최근 극우 정당 관계자가 민간인 신분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체포하고 다니다가 실형을 선고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오히려 사회적 배제와 소외가 계속되면 이주노동자들의 범죄율이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어요. 사회학자 헤인 데 하스는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에서 일부 미국 이주민 2세대의 높은 범죄율은 “하향 동화를 경험하는 이입민 집단의 경제적 소외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국적·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사회적 차별의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지난해 5월 한국의 등록 이주노동자는 101만명으로 처음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미등록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까지 더하면 140만~15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심각한 인구 위기를 겪는 한국에게 이주민 증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언제쯤 이주민들을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하는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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