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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형님의 정년퇴직을 응원한다

“밥은 묵었는가?”

아침 6시. 일어나기도 빠듯한 시간에 무슨 밥을 먹었겠나. 인사성 질문을 던진 P형님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방울뱀 소리를 냈다. 입가심을 하려는지 창고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따르며 내게 권했다. 손바닥을 보이자 예상한 답인 듯 P형님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들이켰다. 사람들이 좀 더 나와야 하니 기다리기 무료한 척 두 번째 잔을 채웠다. 대농이자 작업 창고의 주인인 형님은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 작업을 앞두고 노동에 적합한 혈중알코올농도를 맞추는 중이다. 이리 해야 기운이 난다며 영양제 마시듯 들이켰다.

묵직한 안개와 구름 없는 하늘을 보니 죽어나기 딱 좋은 날이다. 해는 노고단 위로 번듯하게 떴지만 사람이 뜨질 않는다. 모판 작업을 위한 적정 인원은 9명에 다다익선이다. 반자동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꼼짝할 수 없다. 그동안 젊은 50대부터 꽉 찬 70대까지 10명은 쉽게 모였는데, 이번에는 겨우 7명이었다.

매년 등장인물이 줄어드는 추세다. 빈 모판을 넣어주던 어머니는 우울증약 때문에 어지러웠고, 완성된 모판을 챙겨주던 어머니는 치매 증세로 요양원에 가셨다. 볍씨를 넣고 흙을 보충하던 노인회장은 지난달 허리 수술로 걸음이 힘겨웠다. 내가 노인회장 자리에 들어갔다. 볍씨 양과 흙의 점도를 체크하고 불량 모판을 보수해야 하며 볍씨와 흙을 적절히 투입해야 하는 1인 4역이다. 그나마 옆 동네에서 와준 형님 부부 덕에 숨은 쉴 수 있었다. 4시간 만에 2500개 모판 작업을 마쳤다. 8만㎡, 약 2만4000평, 120마지기에 심을 수 있는 양이다.

며칠 후 못자리 작업이 이어졌다. 모판 작업과 비슷한 인원, 비슷한 얼굴들이 모였다. 성탄절 앞두고 연예인들이 연탄 전달하듯 늘어서서 모판을 옮겨 논바닥을 채웠다. 서늘한 아침이슬이 땀으로 바뀔 때쯤 P형님이 “샛거리 묵고 하세!” 외쳤다. 돼지고기 수육과 두릅, 엄나무 순을 주축으로 하는 상이 차려졌다. 잔이 손으로 돌고 쌈이 입으로 들어갔다.

“딱 일흔까지만 하믄 좋겠구먼. 농사도 정년퇴직을 법으로 정해야 써.”

P형님이 의외의 화두를 던졌다. 시중에 나온 모든 농기계를 구비했고, 최근에 지게차까지 구입했다. 2500개 모판 중에 2200개가 형님 지분일 정도로 규모를 갖췄고, 엊그제 보니 그 집 지붕을 새로 얹고 있었다. 농사 많이 짓고 수입도 꽤 되지만 갚아야 할 빚도 제법 많은 걸로 아는데 은퇴 얘기를 하니 의아했다. 힘드신가? 이제 갓 노인회원 되신 분인데.

옆 마을 형님 한 분이 밭 갈다가 쓰러지셨단다. 지난달에도 감자 농사로 유명했던 분이 비슷하게 쓰러져 돌아가셨다. 우리 마을도 아버님 한 분이 요양원에서 집으로 가겠다고 소동을 일으켰지만 집에 오래 계실 수 없었다. 채워지지 않고 떠나기만 한다. 남아 있는 분들도 살아서든 아니든 떠날 날을 걱정한다. 떨어지는 기력을 술로 보충하며 버티는 날도 하루이틀이다.

“나도 올해까지만 짓겠다는 생각을 딱 일흔부터 했어.”

여든다섯 백발의 K아재가 거들었다. 불가능의 무한반복인가. 햇살이 서늘한 논에 서서 P형님의 꿈이 실현되길 응원해본다.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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