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식목일에 열린 ‘체제 전환 충북포럼’에 토론자로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보통 중요한 토론회나 포럼은 서울 등 수도권에서만 열리는데 지역에서도 그런 자리가 마련되어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같은 충청북도라도 내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이나 차를 타야 하고, 대중교통 노선이 턱없이 부족해 참여하는 다른 분의 차를 얻어 타야 했지만 에너지를 쓸 만한 자리였다.
성장의 에너지가 무한한가
포럼의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전환’이란 주제를 충북의 과거, 현재와 연관 지어 다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과제들을 정리했다. 나는 지방소멸 담론의 허상을 지적하는 분과의 토론자였지만 산업과 에너지 전환을 주장하는 분과에도 참석했다. 정부가 주도하고 대기업과 초국적 자본이 이득을 챙기는 지금의 전환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와 지역민이 주도하고 공공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했다.
나는 지방소멸과 에너지 전환이 서로 다른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너지 개념을 전력이나 동력원에서 더 넓게 확장하면, 에너지는 활동에 필요한 능력이나 자원을 뜻한다. 지방소멸이라 부르면 마치 지방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수도권이 지방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며 고사시켜 왔다. 지금이라도 중앙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경제·정치·문화의 에너지가 분산되면, 지방은 다른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전환의 대안이 시급히 필요한데, 지금은 그 내용이 지역의 정체성과 별 상관도 없는 산업과 발전 이데올로기로 채워지고 있다. 충청권 메가시티나 대충특별시(대전충남특별시) 같은 기괴한 기획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미사여구를 빼고 살펴보면 이미 지역 내의 소중심인 중대 도시들을 거점화시켜 수도권을 따라잡겠다는 발상이다. (이미 다른 광역지자체들의 전략에서도 비슷하게 언급되는) 수소와 디스플레이, 바이오산업을 유치하고 발전시키면 충청권이 정말 수도권을 따라잡고 인구를 늘릴 수 있을까? 그 전략의 성공 가능성은 알 수 없고, 전국 어디에 세워도 상관없는 산업단지들이 그 지역의 정체성과 활력을 살릴 토대가 될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기후위기로 인해 에너지 전환이 시급해졌지만 더욱더 근본적인 문제는 화석연료의 고갈이다. 피크 오일(석유 정점)은 이미 현실화했고, 석유는 전력과 동력을 공급하는 연료일 뿐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화학물질의 재료이다.
그런 점에서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인다는 것은 단순히 에너지원과 발전소의 교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합성수지와 합성섬유, 생활필수품 등은 획기적인 대체물질을 찾지 못하는 이상 지금처럼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광역자치단체장들이나 향후 5년을 책임질 대통령 후보들은,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성장과 발전의 판타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충북포럼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이나 ‘지역 정의’ 같은 개념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그 정의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어야 할까? 더 나은 삶은 현재의 조건에서 그 무엇도 놓치지 않는 삶일까? 이제 더 이상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부터 포기해야 할까? 무엇을 더 나눌 것인가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에 관한 합의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톨스토이가 다시 묻는다면
19세기 말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에 의문을 던졌다. 해가 뜰 때 출발해 해질녘에 돌아온 만큼의 땅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욕망에 주인공은 몸을 혹사시키다 돌아오자마자 숨을 거둔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자신이 묻힌 작은 땅이었다.
톨스토이 시대의 대표적인 생산 수단이자 욕망의 대상이 땅이었다면 우리 시대의 욕망은 에너지다. 작품에서는 악마가 농부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표준화된 욕망을 자극하며 남들보다 더 많이 쓰고 누려야 좋은 삶이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그렇게 즐기려 할수록 에너지는 더 빨리 고갈되고 지역은 파괴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는 정말 얼마만큼일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