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진상규명 결정 무관하게 ‘피해자 승소’ 원심 확정
정부 측 ‘석방 날짜 기준 계산 땐 시효 소멸’ 주장 인정 안 돼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인 19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들이 최근 대법원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잇달아 인정받았다. 사건을 대리한 변호인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대법원이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배상 책임을 확정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삼청교육대 피해자 A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정부 측 상고를 지난 17일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별도 심리를 하지 않고 원심 판단을 확정하는 것이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는 4만여명에 달한다. A씨는 1980년 8월10일 경찰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넘겨진 뒤 순화교육을 명분으로 한 가혹행위를 당하고 청송감호소에 수용됐다. 1983년 6월30일 풀려나 정신적 고통을 겪다 2023년 7월 국가를 상대로 ‘3억4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1·2심은 국가가 2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가 “위헌·무효임이 명백한 계엄포고에 따라 삼청교육대에서 순화교육을 받았고, 근로봉사라는 미명하에 구금 상태로 강제노역을 했으며, 보호감호 처분을 받기까지 했다”며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데도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오랜 기간 지연됐다”고 했다.
A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상규명 결정을 받지 않은 점이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됐다. 진실화해위는 2022년 삼청교육대 사건을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벌어진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으로 인정하고 약 400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승소 사례도 잇따랐다.
정부 측은 A씨가 국가폭력 피해를 인지한 날이 언제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정부 측은 A씨가 석방된 날(1983년 6월30일) 등을 기준으로 보면 배상 청구권이 이미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A씨가 출소할 시점엔 국가의 불법행위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다”고 했다. 이어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 등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는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22년 8월30일을 언급하며 “적어도 이때까지는 A씨의 배상 청구권 행사가 객관적으로 불가능해 소멸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소송이 시작된 2023년 7월에도 A씨의 청구권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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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를 대리한 오민근 변호사(법률사무소 한우리)는 “그동안 정부는 진상규명 결정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배상해줄 수 없다며 피해자들을 구분 짓는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번 판결을 통해 소멸시효를 이유로 국가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됐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지난 24일 진실화해위 진상규명을 받은 삼청교육대 피해자 1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정부 측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하고 “국가가 총 14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들을 대리한 조영선 변호사(민변 삼청교육대 변호단장)는 “진실화해위 진상규명이 있었든 없었든 소멸시효에 문제가 없다는 게 확인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