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공개된 미국 국무부 조직개편안은 도널드 트럼프 집권 2기의 미국이 소프트파워의 시대로부터 한층 멀어질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이른바 ‘미국적 가치’를 확산해온 민주주의·인권 관련 업무는 차관 자리가 없어지고 기능은 대폭 축소됐다. 대외원조 전담기구 국제개발처(USAID)가 첫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조직개편 발표 하루 뒤인 23일(현지시간) 팟캐스트 어니스틀리 인터뷰에서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그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계속 강조하되 대사관 차원에서 하겠다는 것”이라며 “지역마다 미국의 국익이 다른 지정학적 현실에서 워싱턴의 한 부서가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또 “인도주의 위기도 신경 써야겠지만 이를 미국의 장기적 이익보다 앞세울 수는 없다”고 했다. 가치와 이익이 충돌할 경우 후자를 선택하겠단 선언이다. 이권을 추구하면서도 적어도 겉으론 가치를 내세웠던 과거 미국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루비오는 미국은 더 이상 단극 패권이 아니며 중국, 러시아, “핵무장한(nuclear-armed) 북한” 등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질서 변화에 맞는 외교정책 조정”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나라이지만 우리의 힘과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는 루비오의 인식은 의미심장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트럼프 취임 후 100일 동안 루비오의 행보를 ‘다극화 세계’에 관한 고민을 담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마가(MAGA) 진영을 의식하며 트럼프 심기 경호에만 충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양성 정책(DEI) 프로그램 중단, 민주주의·인권 업무 감축, 해외 허위정보 대응 조직 폐지 등은 마가 세력의 이념과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조치였다.
지금 국무부는 강경 이민정책을 후방 지원할 뿐 아니라 최전선에서 실행하는 조직이 됐다. 최근 만난 여러 국무부 당국자는 “장관이 가장 주력하는 건 불법이민 총력 대응”이라며 “첫 해외 순방을 서반구로 떠난 것부터 이를 반영한다”고 전했다. 중남미 국가들에 이주자들을 강제추방하기 위한 ‘외교’가 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루비오는 합법 체류자인데도 엘살바도르로 추방된 킬마르 아브레고 가르시아에 대한 법원의 송환 명령에 “미국의 어떤 법원도 외교정책을 수행할 권리는 없다”며 불복했다. 대학가 친팔레스타인 시위에 참여한 외국 유학생들의 비자 박탈도 주도하고 있다. 국가안보를 광범위하게 해석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도 개의치 않는다.
서반구를 제외한 주요 외교정책 결정에서 루비오 ‘패싱’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반도와 직결된 대북·대중 정책에서 루비오의 독자적 역할이 얼마나 될지도 미지수다. 물론 정통 마가 출신이 아닌 루비오가 직위를 보전하려면 충성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가자지구 장악 구상을 생중계 기자회견을 통해 접한 뒤 소셜미디어에 “가자를 위대하게 만들자(Make Gaza Great Again)”고 적는 모습은 어딘가 처량하기까지 하다.
트럼프의 100일 동안 국무장관의 존재감은 희미해졌고, 미국은 소프트파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