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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사회와 선명성의 정치

1808년 여름, 송흠선이 전주 들판에서 참수됐고 그 목은 저자에 걸렸다. 굳이 송시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대부에게는 과한 처벌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송시열 위패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였다. 집권 세력인 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송시열 성인화에 매진해도 못마땅할 후손이 위패까지 훼손했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던 듯했다. 이듬해인 1809년 음력 4월1일, 조정에서는 다시 송시열의 후손 송능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송능상은 송시열의 증손자로, 지역에서 학덕을 인정받아 ‘유일’(遺逸·관직에 나가지 않는 은거한 선비)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지 50년도 더 되었지만, 윤우대를 비롯한 사부학당 유생들은 선현을 깎아내리고 모욕했다는 이유로 송능상을 탄핵했다. 그의 문집 <운평집>에 주자 정론과 다른 입장이 들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禮)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 듯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예는 도덕 본성에 따른 올바른 행동 양식이다. 타자를 우선에 두는 도덕 원리가 어려울 리는 없지만, 현실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올바른 행동 양식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복잡한 상황만큼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한집안 내에서도 의례 절차를 두고 종종 파열음이 나곤 했다. 주자를 비롯한 선현들 역시 모든 상황을 고려해 예제를 만들 수는 없으니, 원칙을 중심에 두고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가운데 당시 유생들이 달달 외운 것과 차이가 나는 내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를 빌미로 송능상에 대해 “선배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의리를 강구하고 밝혀야 한다”는 선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탄핵한 유생들의 말만 들어보면, 송시열의 학문적 성과를 잘 이은 인물로 알려진 송능상 입장에서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특히 예의 문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에, 억울함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송시열의 해석을 따르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골수 노론들이 송능상을 비판하니, 여론도 쉽게 그의 편을 들기 어려웠다. 사부학당 유생들은 송능상에게 내려진 ‘유일’이라는 칭호를 거두고, <운평집> 발간을 위해 판각한 목판을 부수라고 요구했다. 유생들은 아우성치고, 노론 중심의 조정 여론도 송능상의 편을 들지 않자 결국 순조는 유생들의 말대로 시행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송시열 후손으로 평생 지켜왔던 송능상의 명예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순간이었다(<노상추일기>).

송흠선은 송시열 위패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고, 송능상은 송시열과 다른 학문적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송시열을 성인화하는 데 작은 걸림돌이라도 있으면 일단 치우고 보려 했던 노론들에 의해 송시열의 후손들마저 된서리를 맞았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의 선명성을 확보하려 했던 이들은 송시열과의 작은 차이마저 배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조선은 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현실에서 유학 이념이 잘 구현됐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의 지향성이 그러했다는 말이다. 학문적 입장에 따라 당파가 분리됐고, 당파의 수장과 당파가 지향하는 성현의 모델이 일치했다. 이 같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은 이념적 선명성이며, 이는 누가 더 그 이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직결됐다. 다른 이념은 없애야 할 적이며, 선명하지 못한 이념 역시 배제의 대상이었다. 송시열의 위패를 훼손하면 목이 잘렸고, 송시열과 해석이 다르면 후손이라도 배제됐던 이유다. 정치 현장에서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마치 한국전쟁 이후 80년 가까이 같은 이념만 ‘곧이곧대로’ 읊어대는 우리의 오랜 정치 현실처럼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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