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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별들의 빛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지난겨울부터 아껴 읽은 시집의 첫 시에 실린 구절이다. 아름다운 시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두고 싶다. 그래서 김이듬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타이피스트, 2024)는 책상 근처에 두고 언제든 읽었다. 굳게 마음먹었다가도 금세 무너지곤 하는 것이 흔한 인간사라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사실이 유독 아프다. 이 구절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온다. 마음은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는 것. 깨끗하고 고운 마음은 어째서 영원하지 않을까. 눈발로 세차게 쏟아져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눈석임물로 줄줄 흐를 때는 덧없는 눈처럼.

모든 시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시집은 특정 계절의 감각을 가득 품고 있다. 그 계절에만 느껴지는 빛, 온도, 냄새, 소리, 색감이 시집의 분위기로 스며 있다. 어쩌면 시인이란 존재는 그런 미세한 질감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이들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이듬의 이번 시집은 하나가 아닌 여러 계절이 한꺼번에 뒤섞여 몰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집을 읽어갈수록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됐다. 우리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배웠으나, 계절은 분절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으니까. 하나의 계절은 언제나 다른 계절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가고 변해가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와중에 있다.

시간이란 것 자체가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을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모를 수 없다. 시간은 하나의 분명한 시작점에서 출발해서 조금씩 쌓이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흘러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이내 흩어진다. 시 ‘블랙 아이스’에는 미국 포틀랜드로 입양됐다가 친모를 찾으러 처음으로 한국에 온 에밀리가 등장한다. 엄마가 자신과 닮았을지, 살아는 있을지, 기대감과 두려움 속에서 태어난 장소를 향해 걷는 에밀리 곁에서 ‘나’는 과거를 떠올린다. 자신을 버리고도 아무런 그리움이나 죄책감이 없던 엄마를 찾아갔던 기억을. 그 길을 걷는 두 사람에게 남겨진 것은 기원을 찾으리라는 확신이 아니라 또 한 번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 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명확한 기원도 시작점도 없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에게 버려져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 ‘마지막으로’에서 화자는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을 괴롭게 했던 새어머니와 절연하기 위해 그녀를 ‘마지막으로’ 찾아가려고 한다. 매번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연을 끊으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짐은 번번이 무너지고 결별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더 이상 엮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다. “무수한 별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고 빛을 발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빛. 우리는 각자의 궤도를 따라 돌면서 빛을 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서로의 궤도를 침범하며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기도 한다. 그 빛은 마음먹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거나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닿지 않으려는 긴장을 품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서로 부드럽게 뒤섞이면서 스며들기 때문에 아름답다.

애초에 시작이 없었으니 끝도 없을 것이고, 끝이 없으니 언제든 시작될 수 있다. 그런 시간 속에 우리는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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