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外交萬思]대한민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을 찾아서](https://img.khan.co.kr/news/2025/05/01/l_2025050201000045100003121.jpg)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실패한 계엄은 시대착오적이었던 대외정책을 전환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윤석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한 가치외교는 설 자리를 잃었다. 가치외교는 미국 바이든 정부 초기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대결이라는 대외전략을 답습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중기에는 미국조차도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고집스레 이에 집착했다. 실패한 계엄이 아니었다면 그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었을 것이다. 최근 김태효 국가안보실 차장의 방미 외교활동은 시대역행적이고 무책임하다.
한국에는 3대 외교라인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반도 민족파로 진보 라인이다. 두 번째는 한·미 동맹과 친일을 표방한 보수 라인이다. 세 번째는 국익·실용주의파로 정치 현실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시기 각기 진보와 보수의 염원을 담아 북한과의 관계 개선, 한·미 동맹과 친일에 집중하는 정책을 각각 실험해 봤다. 이 모두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것이었다. 혼돈·복합화·다극화라는 시대적 도전에 대응하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된 선택이었다. 새로운 정부의 대외정책은 제3의 대안, 즉 당파성을 초월해 국익을 기준으로 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대응하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태우, 김대중 정부 시기의 외교가 가장 그 전형에 가깝다. 19세기적인 강대국 국제정치가 부활하고,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다시 스멀거리는 현실에서 이념에 경도된 대외정책을 펼칠 공간은 없어 보인다. 윤석열 정부에 의해 방기된 탈냉전 이후 한국의 외교 원칙은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주변 강대국과 적대적인 관계로는 돌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재차 확립할 필요가 있다.
한국 소프트파워 세계 최상위
현재 한국에 필요한 것은 국가 정체성으로서 강대국 마인드를 가지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 어느 비서방 국가보다도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확립한 국가다. 필자는 이 전통을 공화의 정신에 결합해 국가 정체성의 핵심 부분으로 잘 가꿔나갈 새로운 지도자를 대망한다. 한국은 이제 강대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세계적인 수준의 국가이다. 경제력은 세계 15위권, 무역량은 6위권, 군사력도 6위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의 문화 역량과 소프트파워는 세계 최상위권이다. 한국은 북한 중심의, 한반도 주변에 머무는 외교와 미·중 사이에 낀 국가의 형상에서 벗어나 세계적 범위의 전략적 시야를 가진 강대국 외교·안보·경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강대국에 대한 편승이 관습화, 이념화되어서는 안 된다. 주변 강대국의 전략적 의지에 휘둘리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새로운 대외정책 방향은 자강의 의지가 기둥이 돼야 한다. 이 고귀한 ‘자주’와 ‘자강’은 언제부터인가 ‘반미’와 등치되는 개념으로 마치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다. 자강과 동맹이 충돌할 필요는 없다. 홀로 독불장군일 필요도 없다. 한국의 대외정책은 자강의 입장에서 동맹과 국제연대를 합리적으로 결합한 새로운 좌표 찾기에 나서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생존·대외 전략은 우선, 대외 역량과 국내 통합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당파성에 기반한 대외정책은 안정성을 결여하고, 지혜의 결집을 불가능하게 하며, 추진할 동력을 저해한다. 외부적 도전에 대한 대응과 압력에 취약하다. 격변과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국민 공감대에 기반한 대외정책 구현이 국가의 생존과 결부된다는 것을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그간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다. 주변은 낭떠러지 같고, 가야 할 길은 좁기만 하다. 강대국 국제정치는 부활하고 있고, 북한은 핵미사일로 무장했다. 우리의 국내 정치는 양극화되고, 경제적 잠재력은 크게 약화되고 있다. 강대국 관계가 혼돈 국면으로 접어들며 충돌하면 강대국들은 주변부의 약소국 정치에 적극 개입해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려 한다. 국내 엘리트들은 치열하게 친미, 친중, 친러, 친일 등으로 나뉘어 반목하면서 내전으로 내부적 역량을 다 소진하게 된다. 강대국 정치의 승자가 자연스레 역량이 소진된 약소국을 접수하게 된다. 구한말의 상황이 그러했다. 어떠한 탁월한 정치가나 정책도 국내적 안정성을 결여한다면, 그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다.
평화와 발전·번영이 핵심 가치
혼돈과 야만의 시대에 한국 대외정책의 핵심 가치는 평화와 발전·번영이 돼야 한다. 이 시대에는 승리보다 평화가 더 귀하다. 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이 안보와 등치된다. 평화와 발전·번영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5대 대외정책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자강의 군사전략과 역량의 확보가 중요하다. 모든 자율적 외교·안보·경제 정책은 국방 역량이 기반이 돼야 한다. 북한에 대한 3축 전략 중 대량응징보복 전략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 한·미 동맹을 의존 중심에서 시대에 부응하는 공동이익 동맹으로 고도화해야 한다. 가치를 외교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는 중요한 전략자산이다. 셋째, 남북관계를 흡수통일 전략에서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비핵화와 통일은 이 과정에서 중장기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넷째, 주변 강대국과 교감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동북아 지역의 전략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향후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이 돼야 한다. 한·미·일 공조는 물론 환황해, 환동해 소다자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차원의 전략 사고가 필요하다. 해양과 대륙 전략의 겸비, 글로벌 남방과의 협력 적극 추진, 해양안보의 중시 등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부가 직면할 대외 환경은 엄청난 도전의 연속일 것이다. 모든 선택 하나하나가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 윤석열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기존 국내 집권·주류 엘리트들의 수준은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에 미흡할 수도 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이미 생태계가 무너진 외교·안보 영역에서 찾아 쓸 인재들도 태부족일 것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과거로 회귀하지 말고, 좌와 우를 돌아보며 망설이지 말고, 오로지 이 나라를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국민들을 믿고, 미래로 전진하기를 기원한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