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불교는 자본주의 폭주 막아야 한다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불교는 자본주의 폭주 막아야 한다

지난달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한 해인 2013년 <복음의 기쁨>에서 배제와 불평등, 화폐 숭배, 금융투기 등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독재”라고 비판했다. 이듬해 한국의 미사 강론에서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라고 했다. 불교가 태어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500년 전 석존은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막기 위해 평생을 길에서 보냈다.

자본주의는 수만년 동안 일궈왔던 공동체를 일거에 해체하고, 자신의 탐욕 원리에 따라 발전해왔다. 16세기부터 상업, 산업,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변신해오면서 전 세계에 자본제국을 건설했다. 이로써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유행병 확산을 가져와 마침내 6번째 인류 대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 핵과학자회는 핵전쟁, 인공지능 위협 등의 요인을 더해 최근 지구 종말시계를 자정 전 89초에 맞췄다고 한다. 시장에 쌓여 있는 수많은 제품은 인간의 기술과 노동력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온갖 상품을 개발하고 그것에 둘러싸인 행복의 집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가공의 집을 무한히 확장한다.

국제금융협회는 지난해 전 세계 부채 규모가 45경7000조원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를 연출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 부채는 5경1000조원이다. 이 빚의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류가 적정선을 넘어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손들이 써야 할 자원을 도둑질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뿐인 지구는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 개인의 이기심이 시장 균형을 갖춘다는 이론도, 신기술이 인류의 위기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전망도 믿을 수 없으며, 세계는 부의 불평등과 증오의 전쟁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증폭되고 있다.

<역사의 연구>를 쓴 아널드 토인비가 한 강연에서 20세기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불교의 서양 진출”이라고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질문명을 촉진한 서양과 정신문명을 계발한 동양의 만남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도덕성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단 한 사람이 세계 모든 부의 99%를 차지해도 문제 되지 않는 체제다. 공동운명은 안중에도 없다. 불교는 이 사태의 원인인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석존은 <잡아함경>에서 “히말라야산만 한 순금 덩어리를 한 사람이 전부 가져다가 쓴다 해도 마음은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른다”고 설한다. 불교는 오직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일관돼 있다. 몸과 마음을 스캔하듯이 철저히 분석한 불행의 원인인 욕망을 마왕이라고 본다. 석존은 인간 고통의 근원은 뿌리가 없는 욕망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화엄경>에서 설하듯 화가와 같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이 진리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나 사건들은 찰나에 생겨났다가 찰나에 사라진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관의 감각적 욕망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그 끝은 쓰다. 영원한 소유는 불가능하다. 허깨비 같은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이다.

불교는 국가나 부족을 초월해 있다. 언어의 개념에 매여 있지 않고 우상마저도 부정하며, 자신을 구속하는 권위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는 자본의 그림자가 짙다. 선명상은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되고, 깨달음을 위한 고귀한 언어는 셔츠에 새겨져 상품이 된다. 눈 푸른 수행자들이 사라진 사찰에는 관광객만이 어슬렁거린다. 이제 한국 불교는 출가자도 수입하고 있다. 인간 욕망에 정면으로 대항해온 불교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인간에게 회초리를 들지 못한 인과응보다. 무소유의 길을 걸었던 석존처럼 불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본의 폭주에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