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지난 4월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을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했던 행동이 정치적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위로하고 곁에 서는 일에 중립을 핑계로 머뭇대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이 인권침해와 차별 앞에서도 중립은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할 때 방관하는 것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민간은 물론 국가기관에서도 중립을 운운하며 사실상 인권침해와 차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4월28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국가인권위는 2018년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부스를 내고 참가했다. 매해 부스를 내며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촉구해왔다. 그런 국가인권위가 7년 만에 축제에 공식 참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계기는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며 같은 날 개최되는 ‘거룩한방파제 국민통합대회’에서 국가인권위에 참여를 요청한 일이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에 맞서 성소수자들이 자긍심을 드러내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와 그런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개최되는 행사, 국가인권기구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그럼에도 국가인권위는 입장이 다른 양측의 행사 중 어느 한쪽만 참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양측 모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는 결국 성소수자 인권을 반대하는 행사도 국가기관이 고려해야 할 입장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립을 운운하며 차별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국가인권기구가 한발 물러난 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5월1일 이화여대 극장 아트하우스 모모는 한국퀴어영화제에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지난해에도 문제없이 이루어졌던 행사가 취소된 배경에는 성소수자 혐오에 기반한 민원이 있었다. 한국퀴어영화제는 기독교 정신에 반한다며 이화 땅이 전국의 동성애 홍보장이 되지 못하게 해달라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총장실 등에 민원이 쇄도하자 부담을 느낀 극장 측에서 대관을 취소한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공공기관에서의 반복된 대관 거부, 취소가 대학 내 극장에까지 이어지는 이 사태는 몹시 우려스럽다. 이러한 차별이 반복될수록 성소수자 당사자는 단지 행사 하나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서 배제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사태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뭐라 할 것인가. 또 양측 입장을 존중해야 하므로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중립을 이야기하며 차별에 외면하지 말아야 할 곳이 또 있다. 정치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동성혼 법제화와 같은 성소수자 인권 의제에 대해 질문을 할 때면 정치인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성소수자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구체적인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어느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과정이지만 정치인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조율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대의견이 있으니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하다. 인권에 중립이 없듯이 인권은 합의의 대상도 아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며 각 정당에서 분주히 정책 공약을 내고 있다. 오는 10일에는 후보 등록을 하고 12일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 기간이 펼쳐진다. 이번 선거에서 또다시 대선 후보들이 인권 의제를 외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인권침해와 차별·혐오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고,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호히 이야기하는 대선 후보들을 만나길 바란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