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시대를 그린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이 나온다. 사진은 이 영화 장면과 구글 데이터센터 모습을 합성한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된 이후로
선진국을 쫓아가기 위한
선택을 정당화한 담론이
문명화론과 근대화론
그리고 세계화론이었다
세 담론은 모두
외부 중심서 주변의 존재인
한국에 이식됐다
지금은 AI 문명이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AI가 인간지능을 넘어가는
AI 특이점에 곧 이르면
세계화로 심화된 양극화는
엄청나게 증폭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AI 문명에 대한 준비가
그만큼 시급한 과제다
인류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문명을 발달시켜왔다. 특히 동력기관을 발명해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이 관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런데 인류는 최근 들어 기계와의 관계도 재설정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자연지능에 대비되는 인공지능(AI)이 매우 급속히 발달하고 있어서다. AI의 발달은 지구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범위, 규모, 속도로 한꺼번에 바꾸는 문명사적인 전환으로 이어진다고 예측될 정도다. 한마디로 AI 문명은 기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바꾸게 한다. 한반도에서 그 시작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었다. 조약은 조선이 충분히 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한 최초의 근대 국제조약이었다. 우리는 그렇게만 배워왔다. 그런데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시선이 하나 더 있다.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시장·국제질서·가치와 제도)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약 150년 동안 우리보다 앞섰다는 이 세계를 따라잡기 위해 매우 바빴다는 사실 말이다.
문명화
발전한 세계를 쫓아가기 위한 선택을 정당화한 담론이 문명화론, 근대화론, 세계화론이었다. 작동한 시기는 달랐지만 세 담론은 모두 외부의 중심에서 주변의 존재인 한국에 이식됐다. 하지만 일방적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구성원들은 그때마다 세 담론을 나름대로 수용하고 소화해갔다.
문명화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딱지를 붙인 비유럽 지역에 자신의 문명을 전파해 그곳을 발전시켜야 한다며 내세운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에서 문명이란 말은 1880년대에 유길준이 처음 사용했다. 그전에는 개화파, 개화당에서 알 수 있듯이 개화라는 말이 이를 대신했다. 그런데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을 계기로 개화는 ‘역적’의 언어가 됐다.
하지만 유입되고 있는 서구 문명과 그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은 필요했다. 청일전쟁 와중에 실시된 갑오개혁쯤부터 신식 또는 경장(更張)이란 공식 용어와 함께 그 의미를 드러낼 때는 개화라는 말이 다시 쓰이기도 했었다. 문명이란 말도 쓰였다. 일본의 승전을 야만의 실패와 문명의 승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윤치호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청일전쟁이 “서방의 재창조적인 문명과 동양의 퇴락해가는 야만주의 사이의 전쟁이나 다름없다”면서 일본의 승리가 “조선의 구제와 중국의 개혁을 의미”한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윤치호는 “전 동양을 위해 일본이 성공”하기를 바랐다(<윤치호일기>, 1894년 9월27일). 그는 문명화를 절대시함으로써 그 뒷면에 감춰진 일본의 침략성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아무튼 일본의 승전은 ‘예’를 축으로 하는 화이질서 대신 국가 간 관계를 축으로 조선이 문명화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했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교체된 문명의 패러다임과 관련해 구체적인 의견을 가장 활발히 제시했다. 이때 독립신문은 ‘개화 이후의 개화’라는 의미를 함축한 문명개화라는 말을 자주 썼다. 친일파 역적의 개화와 차별화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문명개화를 부국강병하고 자주독립을 보존하는 수단이자 방향으로 간주했다. 한편에서 독립신문은 세계 각국의 발전 정도를 문명국(영국·미국 등)-개화국(일본·러시아 등)-반개화국(대한·청 등)-야만국으로 위계화할 때도 있었다. 문명과 야만의 이항 대립 구도 속에서 서구화를 곧 문명화로 간주하고 그것을 달성해야 할 보편적 목표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독립신문의 문명개화 주장은 대한제국과 밀착하지 못해 국가의 발전 전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준비된 지식의 뒷받침과 권력의 국가 발전 전략이 결합하지 않은 것이다. 지식-권력 관계의 부조화 경험과 다른 역사는 근대화 담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대화
근대화 담론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후보가 1963년 8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즈음부터 적극 차용하며 대중적으로 퍼져갔다. 그런데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은 처음부터 근대화를 내세우진 않았다. ‘혁명 공약’ 중 근대화에 관한 언급이 없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근대화론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군정 기간 그들의 핵심 슬로건은 재건이었다. 이런 그들이 1963년 하반기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 정당성을 설명할 담론으로 근대화론을 제기했다. 4·19혁명 때 확인된 한국의 정치와 사회경제 분야 후진성에 대한 대중의 불만, 달리 보면 탈후진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개발 담론으로 흡수해 지지 기반을 넓히고 정책 동력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마치 야만의 상태를 지적해 문명화의 정당성을 강조했던 개항기 때의 논법처럼.
하지만 지식-권력 관계는 개항기 때와 다른 면도 있었다. 군부 세력에 개발 담론을 기획해준 사람들은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이나 공화당 사무국에 소속된 전문 지식인이었다. 대학교수들도 군정 기간 각종 평가와 기획에 참여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들어온 근대화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케네디 정권에서 국무성 정책기획위원회 의장을 맡은 로스토의 근대화론 책이 1960년에 번역됐다. 그는 5단계 사회 발전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의 단절을 강조했다. 또 한국을 몇차례 방문한 라이샤워 하버드대 일본사 교수는 강연, 전문가 대담, 책 발간으로 이미 유명 인사였다. 1961년 4월 주일미국대사로 부임해 한·일 교섭에도 관여한 그는 선 경제성장, 후 민주주의 향상과 통일 문제 해결을 전문가들에게 제언했다. 로스토·라이샤워식 근대화를 추구한 전문 지식인과 쿠데타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절박한 권력 사이의 연합이 2년여의 군정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전문 지식인 모두가 지식-권력 연합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성장이나 공업화가 곧 근대화라는 군부 집권 세력의 방향성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통을 계승하며 민주화를 동반한 산업화를 근대화로 간주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 중에는 이후 민주화운동 참가자도 있었다.
세계화 그리고 양극화와 AI 문명
김영삼 대통령은 호주를 방문 중이던 1994년 11월17일, 세계화를 국정의 장기 목표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세계경영 전략을 이미 실행하고 있는 일부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새로울 리 없는 구상이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도 돌출적인 구상이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등록된 신문·잡지·방송 기사를 검색해 정리해보면, 1990년에서 1994년 11월16일까지와 그 이후부터 12월31일까지 세계화를 언급한 기사는 각각 512건과 561건이었다. 5년여의 기사보다 세계화 구상만을 언급한 이후부터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의 기사가 더 많을 정도다. 또 전문가 간 논의도 그때까지 활성화해 있었는지 의문이다. 국회도서관의 ‘연속간행물·학술기사’에서 세계화를 검색해보면, 1990년부터 1994년까지는 129건인 데 비해 1995년에만 616건이 게재됐다.
결국 대통령의 발표는 사회적 협의나 전문가 집단의 오랜 숙의 과정을 동반하지 않아 내적 맥락이 결여된 아이디어 수준의 구상을 툭 던진 데 불과한 발언이었다. 문명화와 근대화 담론보다도 숙성 과정이 부족한 국가 어젠다 제시였다. 청와대 참모의 말처럼 “내각에 세계로 눈을 돌리라고 한마디 던진 단계”에 불과한 구상이었던 것이다.
구상을 정책화하기 위한 움직임은 2개월 정도 뒤인 1995년 1월 정부가 민관협력의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세계화 구상’의 발표로 이어졌다. 이때 정식으로 밝힌 ‘세계화 구상’은 다가올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해 경제성장 위주를 탈피하고 국민과 국가를 개조하기 위한 총체적 개혁이었다(<세계화백서>). 하지만 사회적 숙의와 협의가 축적되지 않은 현실에서 민관협력은 관에서 주도하는 하향식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정책 메커니즘에 역점을 두는 국가 중심주의를 답습한 것이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정권이 바뀜에 따라 ‘세계화 구상’은 3년 만에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 담론은 사라지지 않았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후 이미 세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단일화된 데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199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국 경제가 더 세계화했기 때문이다. 가령 금융위기 이후 세계 초민족자본의 한국 진출이 증대하는 한편에서, 한국의 대기업 자본이 초민족자본으로 전화(轉化)했다. 생산수단의 수입의존도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증가하면서 글로벌 가치사슬로의 편입이 더욱 심화했다.
이에 따라 세계화는 양극화를 더 심화시켰다.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경제력 집중과 분배의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한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길어야 5년 이내, 곧 AI가 인간 지능을 넘어가는 지점인 ‘AI 특이점’에 이르면, 양극화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증폭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내란 잔불을 철저히 꺼야겠지만, AI 문명에 대한 준비도 그만큼 시급한 과제이자 시대정신인 것이다. AI 특이점에 다다를 때까지, 그 이후에 더 격해질 양극화를 방지하고 AI의 성과를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갈라질 수 있다. 그러면 민주공화정이 무너지고 극소수의 독점 계급이 통치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황제정이 배경인 영화 <듄>처럼.

신주백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