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천일야화였다고 할까? 윤석열 정부 1061일 동안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충분히 듣고 보았다. 윤석열 파면 이후 더 이상 기담괴설은 들을 일이 없겠거니 했다. 오해였다. 한국 정치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끝나는 법이 없다는 걸 깜빡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덕수가 대선판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기회주의자라고 해도, 내란 정부 2인자인데 또 기회가 왔다고 전국을 누비고 있다. 그는 국민의힘 지원으로 짧은 선거 기간을 거쳐 대통령이 되는 지름길을 따라갈 참이다. 정치 핵심인 정당과 선거를 권력 획득의 일회용 도구로 이용하는 반정치, 반칙 행위가 제2당의 기획하에 펼쳐지고 있다.
이념의 화신 김문수도 나섰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 가장 극단에 위치한, 내란 세력을 대표하는 그는 자신이 속했던 정부의 총리였던 인물과 내란 정부 출신 단일화라는 서커스를 보여주려 한다.
조희대도 대선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그의 대법원은 이재명이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것이 맞다며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정치인의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할 필요가 있다며 유죄 선고한 1심,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며 무죄 선고한 2심 사이에서 1심의 손을 들어줬다. 특별히 시비할 게 없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표현의 자유 제약이 심한 편이다. 특히 정치적 표현 규제는 세계 최고다. 돈은 묶되 입은 풀어주라는 격언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공직선거법은 그런 규제를 대표한다. 정치 불신·혐오의 결과이자 한국 사회 합의 수준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에서 대법원 판결은 정치인에게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가라는 생산적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개월밖에 안 남은 선거가 문제였다. 누가 다음 정부를 이끌어야 할지 후보 자질, 국정 비전과 정책을 내놓고 토론하고 검증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다. 정당, 후보, 시민 모두 집중이 필요하다. 대법원은 집중을 방해했다. 세상의 관심을 온통 남은 사법 절차에 쏠리게 했다.
이재명이 후보 등록 마감 후 피선거권 박탈 판결을 받아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되는 게 아닌지, 이재명이 당선돼도 재판을 계속하면 다시 대선을 치르는 일이 생길 수 있는지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 혼선을 정리해줄 권위 있는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고법은 이재명에게 재판받으러 나오라 재촉하고, 국민의힘은 후보 사퇴하라 촉구한다. 정당과 사법부도 충돌한다. 민주당은 조희대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대법원은 해명과 반박을 한다. 선거 과정은 사실상 허공에 사라졌다. 대혼란이다. 조희대는 자신이 판결을 서두른 목적으로 제시한 혼란 종식에 실패했다. 그는 이런 대가를 치르는 게 마땅하다고 할 만큼 지키려 한 가치가 무엇인지 설득하지도 못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전적으로 대법원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사람, 특정 제도만의 문제였다면 이렇게 난마처럼 얽혔을까? 실패한 정치가 사법부를 정치로 초대하지만 않았서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법 리스크가 있는 정치 지도자가 존재하고, 다수 시민이 그를 지지하며, 제1당 후보로 선출한 것도 정치의 일부다. 사법부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는 이재명을 유죄로, 누구는 무죄로 믿을 것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각자의 판단과 선호를 표출하도록 주권자의 시간을 존중했어야 했다.
선거는 시민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대법원은 이 순간을 훔쳤다. 주권 행사를 침해했다. 대법원은 ‘판단중지’를 했어야 했다. 판결하지 않는 것도 사법부의 역할이다. 미국법원도 그렇게 했다.
대법원이 서둘러 선고한다고 했을 때 많은 시민이 기대한 것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숙의와 설득 없는 판결은 시민 전체를 상대로 한 갑작스러운 일격이 되고 말았다. 선고를 하지 않는 행위도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무엇을 하든 정치적 시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부작위에 따른 최소한의 영향을, 적극적 행위로 인한 대혼란과 비교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선거는 국정 과제에 관한 합의 도출, 통치권에 대한 정당성 부여, 공정한 경쟁과 선거 결과 승복을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새 정부에선 이런 기능이 작동할까? 예단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대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