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한 수도권 정수수센터에서 수질검사를 위해 시료를 채취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민들에게 공급되는 전국 정수처리장의 수돗물에서 ‘잔류의약물질’이 검출되고 있다. 의학이 발달하고 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는 약품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채 수돗물에 남아있는 경우다.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환경당국의 대응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6일 부산대, 국립환경과학원 등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물 연구 X(Water Research X)’에 지난해 9월 게재한 ‘전국 정수장의 원수 및 처리수에 함유된 의약품: 의약품의 유래에 대한 인사이트 및 노출 위해성평가’ 논문을 보면 전국 70곳의 정수장의 원수에서는 30종, 정수 처리를 거친 물에서는 17종의 물질이 검출됐다. 특히 시민들에게 먹는물로 공급되는 처리수에서는 고혈압치료제인 텔미사르탄과 발사르틴, 항진균제인 플루코나졸, 항경련제인 카바마제핀, 항생제인 클래리트로마이신이 높은 농도로 검출됐다.
연구진은 고혈압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는 텔미사르탄의 생태계 위해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다른 의약물질들의 위해지수(RQ)는 높지 않은 수준으로 나타났지만, 텔미사르탄의 평균 위해지수는 12.0에 가깝게 나타났다. RQ가 1보다 크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보며, 숫자가 클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 이들 물질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아직까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고된다. 다만 2세 이하 유아와 3~12세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성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고혈압 환자들이 복용한 뒤 배설하거나 남은 약을 그대로 버리는 등의 원인으로 자연환경에 유출된 텔미사르탄 오염은 국내만의 문제는 아니다. 스페인에서는 28~972에 달하는 RQ가 기록됐다. 국내에서도 낙동강 등에서 높은 위해성이 보고됐다. 이 물질은 반감기가 매우 길고, 지표수와 하수에서 제거 효율도 낮아 골칫거리로 여겨지고 있다.
연구진은 텔미사르탄 외에도 록시트로마이신과 벤라팍신의 경우 일부 정수장의 원수에서 위험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으며, 니코틴의 대사 산물인 코티닌이 높은 위험성을 나타낸 지역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니코틴의 대사 산물인 코티닌과 항생제인 클래리트로마이신, 심부전 및 우울증 치료제인 라모트리진의 독성도 잠재적으로 인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폐의약품은 종량제봉투, 하수 등을 통해 배출되면 항생물질 등 약 성분이 토양이나 하천으로 유입돼 수생태계를 교란하고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환경부가 2017년 폐의약품을 생활계 유해폐기물로 규정하고 폐기 방법 등을 제도화하고 지자체의 관리 책임을 강화했지만, 여전히 일반 쓰레기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수거 체계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최경호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텔미사르탄뿐 아니라 고령화로 인해 장기 복용하게 되는 만성질병 치료약들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약물질을 포함해 기존의 오염물질에 비해 양은 적지만, 생태계나 인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량오염물질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환경당국과 지자체 등은 이들 물질을 모니터링하고, 수돗물에서 제거하기 위해 정수처리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환경부의 경우 낙동강 등 주요 하천 상수원에서 미량오염물질을 조사해 경과를 공개하고 있다. 서울시 아리수본부는 지난 2월 텔미사르탄을 포함한 의약물질과 산업용 화학물질 등 5개 미규제 신종물질의 검사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의 감시체계와 고도정수처리 시스템만으로 의약품 등 미량오염물질을 완벽하게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고령화로 고혈압 등 만성 성인질환 관련 의약품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상황임에도 정부 대응은 지나치게 더디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현행 먹는물 수질기준 및 수질감시기준에는 의약품 등 미량오염물질에 대한 기준은 없다”면서 “수돗물 중 미규제 미량유해물질 관리방안 용역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진행 중으로, 향후 그 결과에 따라 관리기준 마련 등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인구 고령화로 인해 고혈압 치료제 사용이 점점 더 늘어날 것임을 감안하면 정부가 빠르게 텔미사르탄 등 물질에 대한 대응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연구진은 텔미사르탄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상수원과 정수장 처리수에 대한 의약물질에 관해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폐의약품의 안전한 수거와 처리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대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1999년부터 주기적으로 잔류의약물질을 포함한 미규제 오염물질을 조사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주요 하천 및 상수원에서 잔류의약물질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는 일부 의약물질을 우선감시물질로 지정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미나 단국대학교 예방의학과 교수는 “정수장 원수에서 많은 의약품들이 생태계에 미칠 위해성이 매우 높은 수준에서 검출되고, 이중 많은 약물들이 정수 처리에도 불구하고 수돗물에서 검출됐다는 것은 정수 처리의 효율성을 제고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약품이 물환경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폐의약품의 수거와 폐기 등 사전관리 체계 개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