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몰’ 연작 중에서. 2012. ⓒ김지연
어린 시절 같은 마을, 혹은 이웃 마을 사람들 사이에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마을에는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반란군, 빨갱이, 경찰 그런 낱말들만 들렸고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증오는 자식대까지 물림을 받아 서로 치고받고 했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미군정에 저항하기 위한 무장봉기가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로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려 했으며, 같은 해 10월11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4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이 이에 반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토벌대를 조직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을 좌익으로 간주하고 무차별적인 색출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은 반란에 가담했거나 협조했다는 의심만으로 주민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양민이 희생됐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계에 있는 순창에서 담양으로 이어지는 낯익은 국도변에 ‘한국전쟁 전후 양민 피학살자 매몰 지역’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주변을 촬영할 때만 해도 이것은 과거의 국가 폭력 사건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12·3 내란을 TV 중계로 지켜보았고, 지금도 숨어 있는 국가 폭력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증거로 대법원 쿠데타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지귀연 판사와 심우정 검찰총장이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석방하는 황당한 사법쇼를 자행했다.
내란 세력이 야합해 대통령 후보를 내세운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제1당 유력 후보를 법의 외피를 쓴 정치적 술수로 제거하려 한 대법관 10명의 판단은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각 부처는 헌법에 따라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행정부는 행정부답게, 입법부는 입법부답게, 사법부는 사법부답게 처신하라. 국민을 인질로 삼아 권력을 휘두르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은 정치보다 국민이 더 성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