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록 산빛이 싱그러웠던 지난해 4월, 나는 대중이 머무는 남원 실상사를 떠나 햇볕 좋은 화순의 작은 절에 자리를 잡았다. 신도가 거의 없는 이 산골 절에서 올해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했다. 비록 가난한 절이지만 소박하게 부처님 생신상을 마련하고 몇몇 불자들과 함께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뜻을 되새겼다.
올해 부처님오신날 불교계는 “세상에 평안을, 마음에 자비를”이라는 봉축 표어를 내걸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문구는 석가모니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드러낸다. 평안과 자비. 익숙한 말이지만, 인간 삶에서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소중한 가치는 드물다.
문득 <법구경> 말씀이 떠오른다. “모든 생명은 죽임을 두려워하고,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견주어,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 자명한 말씀이지만, 인류 역사의 그늘을 돌아보면 그 의미는 더욱 깊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열 경쟁과 약육강식, 독점과 패권으로 얼룩진 미혹의 문명을 성찰하며 함께 살아가는 밝은 문명으로 전환하려는 길 위에서 평안과 자비는 가장 숭고하고 지순한 가치다.
지금도 세상의 수많은 생명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내가 이를 구제하리라.” 붓다의 탄생 선언이 다시금 가슴 깊이 새겨진다.
고통에서의 해탈은 오늘날 언어로 표현하자면 ‘존엄성의 실현’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생의 여정은 모두 인간 존엄의 구현을 향한 길이었다. 자비의 극치인 ‘동체대비(同體大悲)’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능력이며, 연민과 공감을 통해 존엄을 실천하려는 자세이다.
그러나 존엄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핵심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혜’다. 붓다는 지혜로운 삶이 곧 자비의 실천이라고 하셨다. 지혜와 자비는 존엄한 삶을 지탱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종교적 언어가 절대성과 교조성에 갇히면 그 의미는 쉽게 추상화되고 관념화된다. ‘지혜’ ‘깨달음’ ‘자비’ ‘해탈’ ‘구원’ ‘하느님 나라’ 같은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때가 그러하다.
지혜는 본래 간명하다. 그것은 ‘나와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고,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통찰하며, 그 의미와 방향을 분별하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이 지혜의 눈을 흐리는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일까? 탐욕과 집착, 격정의 불길이 첫 번째이고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태도가 또 하나다. 예컨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도자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불신하고 공격하는 행위는 정치와 종교를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병리다.
이 모든 혼란은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악의 평범성’을 천착한 아렌트는 경고한다.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받을 수 없다. 무지는 지식의 부재이지만, 무사유는 의미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말이나 현상을 마주할 때 그 원인과 의도를 다양한 관점에서 성찰해야 한다. 반증 가능성이나 오류의 여지를 차단한 채 맹신하는 순간 대중의 사고는 교활하고 음험한 자들에 의해 조작되고 만다.
붓다는 고요한 감정 상태에 몰입하는 것이 열반이고 지혜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고 경고하셨다. 대신 비판적 사유와 숙고를 수행의 본질로 삼으셨다.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나와 세상의 실상을 바로 보고 지혜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보아야 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고통과 혼돈이 일어나는 현실의 한복판이다. 탐욕과 무지가 만들어낸 위기와 위험을 직면하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다.
세상의 평안을 바란다면, 먼저 그 불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에 자비를 심고자 한다면, 내면 깊숙한 곳에 도사린 분노와 탐욕의 어둠을 마주해야 한다. 사유와 숙고는 때때로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고통을 피해서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어둠을 직시하지 않고선 빛은 다가오지 않는다.

법인 스님 화순 불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