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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성 과잉 민주주의

정치가 권력투쟁 이상이 아니게 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여러 영역도 그에 상응해 변형됐다. 비당파적이어야 할 행정 관료의 수장이 느닷없이 대선에 출마하고 후보 단일화를 강박하질 않나, 사법부가 당파적 입장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나, 입법부가 공안 검찰처럼 특정 세력 척결을 말하며 공포감을 조성하지를 않나, 가히 비정상의 시대다. 삼권분립 없는 민주주의, 혹은 삼권이 모두 당파 싸움을 하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다.

삼권이 ‘분립’ 아닌 ‘당파 싸움’

권력기관만 그런 게 아니다. 필자가 볼 때 적지 않은 기사가 언론 공론장이 아니라 당파 기관지에 실려야 마땅하다. 교회가 거리에 나와 당파적 적대를 부추기는 것도 일상이다. 공익적 덕성에 윤리적 토대를 두어야 할 시민운동도 당파적 적대를 부추긴다. 학계는 다를까?

대선 캠프에 이름을 올렸다는 동료 정치학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차기 정부에서 뭐라도 하려면 자문그룹 명단에 이름이 있어야 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나중에 정치적 신원 증명이 된단다. 그는 자기 말고도 캠프에 이름을 올리려는 학자가 많다고 했는데, 그것도 사실일 것이다. 과잉 당파성의 문제는 학계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된다. 2016~2017년 촛불집회는 진보에서 합리적 보수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한 사회 대연정이었다. 이를 뒷받침한 건 4개 정당이 협력해 결성한 탄핵 정치동맹이었다. 덕분에 헌재 결정과 조기 대선에 이르는 긴 시간을 큰 불안감 없이 인내할 수 있었다. 신뢰할 수 없는 차기 대통령의 인격적 문제 때문에 걱정할 일도 없었다. 제1당 후보가 41%를 득표하고 뒤이은 후보들이 24%, 21%, 6%, 6%의 지지를 얻었지만 적대와 분열을 걱정하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온건 다당제로의 발전과 다원 민주주의의 전망 속에서 다양한 연합정치의 장이 열리길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로부터 8년이 지나 다시 대통령을 탄핵하고 조기 대선을 하게 됐지만, 상황은 딴판이다. 정치는 양당 독과점 체제다. 시민사회 곳곳이 양분되면서 서로를 비토하는 목소리만 있다. 공통의 믿음을 가진 하나의 국민은 없고, 한 나라 안에 두 국가, 두 국민이 있다. 너희 대통령과 너희 정부가 있을 뿐, 우리 정부나 우리 모두의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없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기적 같다. 산업화나 민주화는 물론 세계화의 파고도 잘 넘었다. 앞선 세대의 큰 수고가 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도 자리를 잡았다. 진보 시민, 보수 시민 모두 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도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그 절정의 순간에 대통령이 적폐와 반적폐 싸움을 동원하면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성공한 다음 대통령은 세상을 다시 국가와 반국가 세력으로 양분시켰다. 이제는 내란 세력과 내란 척결 세력의 싸움을 이끌 대통령을 맞이하게 됐다.

지식인·학계도 정치에 동원돼

이 모든 과정에 학자나 지식인 참여가 있었다. 국면마다 그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적대적 해석을 정당화했고 덕분에 권력자 주변 자리 한편을 채웠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치 양극화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정치를 부추기는 지식인들도 문제다.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그들 주장이 정반대로 달라지는 것을 보며, 학문의 윤리적 고향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학자란 진리의 왕국에 봉사하도록 오랫동안 특별하게 훈련된 사람이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정념에 더 쉽게 이끌리는 존재이기에 당파적 동원에 취약하다. 따라서 어느 사회든 당파와 무관하게 명예와 존경을 보상으로 하는 영역을 보호해 왔다. 지식사회가 대표적이다. 권위주의 정권조차 학자나 지식인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지식인은 권력의 안티테제 같은 존재다. 진리가 당파의 부속물이라면 학문의 자율성은 터무니없는 이상일 것이다. 그들은 당파적이기보다 사회 전체를 객관화해 말하는 존재다. 학문적 열정과 지성의 불꽃은 인간 사회에 언제나 필요하다. 그들은 체제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같다. 지식인도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학자들의 의견이 다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견 차이는 당파가 아니라 학파 중심으로 전개될 때 가치가 빛난다. 당파적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공동체 미래를 두고 말할 때 도덕적 힘을 갖는다.

권위주의는 정치 무관심을 조장하고 전체주의는 과도한 정치화를 동원하는 것과 달리, 민주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들의 자율적 기능과 역할에 토대를 둔다. 정치는 정치다워야 하고 행정과 사법은 초당적 합리성과 공정성의 규범을 준수해야 하듯, 학계 역시 보편적인 지성의 전당이어야 민주주의 발전에 복무할 수 있다. 정치가 필요한 곳에 정치가 없고 정치적이지 않아야 할 곳에 당파적 열정이 늘면 사나운 세상이 온다.

박상훈 정치학자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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