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사기 피해자인 이모씨가 8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문광호 기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해 한 말 중 기억나는 게 있나요? 표 구할 때는 청년, 청년 했지만 정작 청년들 피해가 이렇게 심한데.”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에서 만난 전세사기 피해자 이모씨는 지난해 12월3일 윤 전 대통령이 불법계엄을 선포했을 때 “덤덤했다”고 말했다. “계엄을 하고도 남을 대통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자신의 억울함만 되뇌는 모습에 “언젠가는 터지겠다”고 짐작했다. 스스로를 위해, 또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해 이씨는 탄핵촉구 집회로 향했다.
대선을 앞둔 지금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할까. 이씨는 “조그만 희망이라도 줄 수 있는 후보를 뽑겠다”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전세 보증금 반환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23년 11월이다. 건물 관리인으로부터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문자를 받았다. 건물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결국은 내 탓이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옥좼다.
정부 도움은 제한적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건물 1층에서 오가는 세입자들을 붙들고 상황을 공유했다. 곧 SNS 단체대화방이 만들어졌고 공동 대응을 시작했다. 건물주를 고소하고 자체적으로 건물 관리에 나섰다. 이씨는 건물주가 155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135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서야 자책에서 벗어났다.
이씨가 느끼기에 윤 전 대통령과 정부는 전세사기에 무관심했다. 윤 전 대통령은 2023년 5월 “과거 정부의 반시장적, 비정상적 정책이 전세사기의 토양이 됐다”며 전 정부로 책임을 돌렸다. 2024년 5월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을 담은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이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을 거리로 이끈 도화선이 됐다.
이씨는 특히 윤 전 대통령이 청년을 강조하면서도 전세사기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40대인 그는 “저는 청년 세대는 아니지만 윤 전 대통령이나 정치권은 늘 청년 문제 얘기를 하지 않나”라며 “전세사기를 보니까 청년들이 주로 피해를 봤다. 가장 중요한 주거와 관련해서 이런 피해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니까 답답했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자 수는 5월 현재 2만9540명으로, 이 중 70% 이상이 2030 세대다.
이씨는 피해자 추모집회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의 얘기를 들으며 펑펑 울었다. 쉽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더욱 힘들게 했다. 그는 “희망이 없었다”며 “다른 정부였다면 우리가 하소연을 했을 때 반응을 할 거란 기대가 있었을 텐데 윤석열 정부라 ‘이대로 몇 년을 그대로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불법계엄에 공감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씨는 “(계엄을 선포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얘기들뿐이었다”며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나”라고 말했다.
유권자로서 이번 대선의 선택 기준은 명확하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후보를 뽑겠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 확대를 공약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면 위안이 될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게 고통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차기 대통령은) 좀 부족해도 국민하고 소통을 해보려고 애썼으면 좋겠다”며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정치야’라는 말이 제일 싫다. 정치를 잘못하면 결국 우리가 피해를 본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