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 표를 더 달라는 말이야 어느 정당이나 한다. 이왕 당선될 거라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고 싶다는 기대에 잘못은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 승리가 민주주의의 압도적 승리일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계엄까지 겪었으니 압도적 안정감을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 숨은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은 지난 대선에서 0.73%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간신히 이기고도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선출된 대표에 부여된 정당성의 한계를 고심하는 대신 선출된 대표에 부여된 권한의 한계마저 부숴버렸다. 여기서 남겨야 할 교훈이 압도적 득표는 아니다. 집권의 정당성이 득표율로 보증된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압도적 정권교체는 선거의 결과일 수 있을지언정 민주주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압도적 정권교체’가 침묵을 강요하는 말이 되어가는 것은 더욱 우려스럽다. 여성 지우기는 노골적이다. “왜 자꾸 남성 여성을 가릅니까? 그냥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들 아닌가요?” 이재명의 말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윤석열의 말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을 이기자고 윤석열의 선거 전략을 따라 한다? 민주당은 덜 대표하면서 더 득표하려고 한다.
대표성은 어려운 숙제다. 정책공약에 무엇을 넣거나 빼는 일과 다르다. 정체성으로 획득되거나 보증되지도 않는다. 소년공이라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여성이라고 여성이 대표되지 않는다. “국민과 함께 이기겠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다 같은 국민’에서 누가 더 지워지고 뭉개지는지, 누가 더 대표되며 권력을 누리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노력이 대표성을 키운다. 민주주의의 힘은 덜 대표되던 사람들이 더 대표되고 더 대표하게 될 가능성에서 나온다.
대표하는 일은 누가 여기에 있는지 보이게 하는 일이다.
계엄 이후 광장에 그런 투쟁과 도전이 있었다. 성소수자로,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는 이들이 재난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짓는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이주민과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호명을 넘어 연대의 실천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누가 무대에 서더라도 언제나 그의 정체성을 초과하는 ‘우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구체적 얼굴을 지우지 않고도 보편적 얼굴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시간. 압도적 대표성을 만들어간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2030 여성’은 광장의 지분을 요구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대표성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파면 이후 빛의 속도로 광장을 지우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만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 정권교체를 위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광장 대선 후보’로 선정하고 지지한다.” 지난주 ‘광장대선연합정치시민연대’라는 단체가 야 5당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광장 대선 후보’를 ‘선정’할 권한은 누가 주었나. 정권교체를 넘어서자던 광장의 목소리를 ‘압도적 정권교체’로 둔갑시키며 민주당에 사회대개혁 과제 목록을 안긴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민주주의는 허약해질 뿐이다.
광장에 나섰던 이들 모두 내란의 진원지인 국민의힘이 덜 득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자멸의 길을 향하는 국민의힘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에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안 된다. 광장을 이어가려는 정당은 더 대표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 안에 내 자리가 있고 내가 초대할 사람들이 있다고 느낄수록 민주주의는 강해진다. 선거를 넘어 풀뿌리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할 힘. 압도적 정권교체가 아니라 압도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승리로 길을 낼 선택지가 있어 다행이다. 압도적 득표와는 다를, 민주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를 바란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