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한수빈 기자
휴대전화 대리점 운영자에게 자신의 명의로 여러 번 유심을 개통하도록 허락하고 돈을 받은 70대 남성에 대해 대법원이 항소심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유심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는 판단이다.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지난달 24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A씨(76)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20년 12월 4일 대전 중구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운영하는 B씨로부터 “선불 유심(일정액을 먼저 지불하고 정해진 양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받는 것)을 개통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B씨는 “개통실적이 필요해서 선불유심을 개통하는 것일 뿐이다. 타인에게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A씨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A씨는 개통에 필요한 가입신청서, 가입사실 확인서약서를 작성한 뒤 신분증과 함께 제출해 B씨가 선불 유심을 9차례 개통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대가로 회당 2만~3만원을 받았다. 일부 유심은 보이스피싱 범죄에 쓰인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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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은 A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으나 2심은 A씨가 무죄라고 봤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고령이고 장애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개통실적 쌓는 용도로만 개통할 것’이라는 B씨의 말을 믿고 단순한 호의로 도와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를 다시 뒤집고 A씨를 처벌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A씨는 유심이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된다는 것에 대해 알았거나, 적어도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될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면서 이를 용인하는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 과정에서 A씨가 선불 유심 1~2개를 개통해줬다고 인정한 점, B씨로부터 대가를 받은 점, 척추 및 하지관절의 장애가 인지능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