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스 라벨
들은 걸 또 듣는 게 클래식이다. 연주한 걸 또 연주하는 것도 클래식이다.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한다.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 2024년은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200주년, 2027년은 베토벤 서거 200주년과 같은 식이다.
올해는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이 태어난 지 150년 되는 해다. 20세기 클래식 거장 라벨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프랑스만이 아니다. 멀리 한국의 문화예술계도 라벨에 푹 빠져 있다.
영화로 보는 라벨, <볼레로: 불멸의 선율>
라벨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멜로디를 들어보면 “아, 이 노래”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이 그의 1928년작 ‘볼레로’다. 이 곡의 탄생 비화에 라벨의 일대기를 얹은 전기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이 지난달 30일 개봉해 잔잔한 인기를 얻고 있다. ‘속성 과외’ 식으로 라벨을 알아가기에 이 영화만 한 교재는 없어 보인다.

영화는 시끄러운 기계음 소리가 가득한 공장에서 시작한다.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듯 피스톤 운동과 원운동을 하는 기계음이 끝없이 반복된다. 라벨에게 작곡을 의뢰한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은 “이런 지저분한 데서 뭐하냐”고 묻는데, 라벨은 “느껴지나.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전진하는 시간의 행진이”라고 말한다. 이윽고 ‘볼레로’가 오케스트라, 재즈, 칸초네, 오페라, 비보잉, 발레 등 온갖 버전으로 울려퍼진다. 마치 “이 노래 들어봤지?”라고 묻는 듯한 오프닝이다.
연출은 <코코 샤넬>(2009)의 감독 안 퐁텐이 맡았다. 감독은 라벨의 인생과 걸작의 탄생 배경을 프로이트적으로 탐구한다. 영화를 보면 ‘라벨을 키운 건 팔할이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볼레로풍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다정했던 스페인계 어머니부터 파리 예술계의 ‘뮤즈’ 미시아 세르, 무용곡을 의뢰한 이다 루빈슈타인, ‘지음(知音)’ 피아니스트 마르그리트 롱, 파리 화류계의 여성들, 미국 재즈클럽에서 만난 여인 등이 마치 볼레로의 반복되는 선율처럼 라벨의 인생 주위를 돌고 돈다.

영화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듣는 맛도 충분하다. 라벨의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은 영화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라 발스’ ‘밤의 가스파르’ 등 그의 작품은 물론 쇼팽의 왈츠와 녹턴도 등장한다.
발레로 느끼는 라벨, <워킹 매드>
춤곡에 능한 라벨을 배경음악으로 하는 발레 공연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25 대한민국 발레 축제’ 개막작으로 지난 9일부터 18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워킹매드 & 블리스>가 바로 그 공연이다.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안무가 요한 잉에르의 두 작품을 더블빌 형태로 올린 작품인데 이 가운데 <워킹 매드>에 라벨의 ‘볼레로’가 쓰인다.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에도 등장하는 이다 루빈슈타인의 ‘볼레로’ 발레 초연 때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선율이 18번 반복되는, 이전까지 들을 수 없던 음악을 접한 한 관객이 “라벨은 미쳤다”고 했다. 이를 들은 라벨은 “그 사람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했다는 일화다. 잉에르 안무가가 25년 전에 만든 발레 공연 <워킹 매드>도 그런 ‘광기’를 표현한다.

음악 ‘볼레로’의 지배적인 키워드는 끝없는 반복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공장의 기계가 그러하지만 기실 인간의 삶이 끝없는 반복이다. 지구는 매일 돌고, 사람들도 매일 집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같은 잠자리에 든다. 발레 <워킹 매드>의 중요한 오브제는 무대 위 거대한 벽인데, 무용수가 아무리 밀어내도 다시 밀고 들어오고,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서는 장치가 벽이다. 이 벽을 넘나들며 무용수들은 끝없이 춤을 춘다.
잉에르는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벽은 작품에서 또 하나의 무용수라고 봐도 될 만큼 큰 역할”이라며 “볼레로가 단조로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벽을 통해 ‘여정 속의 역경’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18일까지.

듣는 클래식, 조성진과 서울시향
‘젊은 거장’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올해 라벨 탄생 150년을 맞아 지난 1월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과 2월 피아노 협주곡집 앨범을 발매했다. 조성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라벨의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를 처음 접한 뒤 예원학교 재학 때는 친구들 앞에서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중 ‘스카르보’를 치면서 기술을 자랑하는 등 라벨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조성진은 라벨을 들고 다음달 12일 인천을 시작으로 7월까지 전국 투어 연주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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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 편곡의 대가’ ‘오케스트라 음향의 마법사’ 라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연주회들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5월15~1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정기공연 <드뷔시와 라벨>에서 라벨의 ‘고귀하고 감상적인 왈츠’를 연주한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은 오는 23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댄스, 발스, 볼레로> 공연을 열어 ‘볼레로’와 ‘라 발스’ 등을 연주해 보인다. KBS교향악단도 7월 정기연주회에서 ‘볼레로’를 들려줄 예정이다.

서울시향 드뷔시와 라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