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창하고 줄어드는 ⓒ이훤
100여명이 겨우 드나드는 협소한 기차역에 들어선다. 곧 철거 예정이라고 한다. 기차역에서 지난 세 달간 만든 연극을 생각한다. <엔들링스>. 최후의 개체들이란 뜻이다. 왜 연극이 떠올랐을까.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철거되는 그것을 꿋꿋이 응시하는 창작자들이기 때문이었을까. 수십명이 설계한 그 작업 또한 곧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일까.
배우로서 연극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다. 몇달간 자기 안에 새로운 인간을 건축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다.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니. 타인의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타인처럼 움직이는 데 그들은 매일 몇시간을 쓴다. 배우의 시선과 속도는 연출과의 긴 대화 끝에 명확한 의도를 가진 채 태어나기도 한다.
그 현장에서 역시 조금 놀라고 만다. 다시 들어설 수 없는 건축물을 위해 이토록 많은 골조를 세우고 있다. 늦은 밤까지 완성한 장면을 의구하고 또다시 덧댄다. 텅 빈 연습실에서, 동네를 뛰면서, 버스에 오르내리면서, 고양이를 돌보면서 일면식 없는 인물을 들이기 위해 낯선 대사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이로운 동료들을 나는 훔쳐본다.
무대 한쪽에는 묵묵히 조개 인형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있다. 그는 미역을 길어 올리고 조개를 만들고 빌딩 판자를 짓는다. 무대감독은 무대에 바다를 데려오는 사람이다. 다른 대륙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조명감독은 빛을 쏘아 거기 새 시간을 만든다. 시간의 속도를 결정하고 관객 시선의 면적도 결정한다. 대본을 현지화하는 윤색가는 배우들이 몰랐을 각본의 전후를 알게 해준다. 인물이 두터워진다. 극을 관장하는 드라마터그를 통해 인물 안의 텍스트가 풍부해진다.
연출가는 이 모두를 살핀다. 이야기의 모든 것을 다듬는 동시에 바깥의 눈으로 극을 점검한다. 하나의 공연에는 그렇게 완성된 공동의 큐가 수없이 배치돼 있다. 두 시간의 공연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담한다.
침묵과 박수를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이 무대에 선다. 폐쇄될 걸 알면서 거기 서는 사람들을 나는 조금 더 좋아하게 됐다.
공간에 쌓인 시간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를테면 극장에 퇴적된 시간을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 끝없이 들어서고 철거됐을 이 사람들의 생애를. 여러 인물의 표정이 쌓인 그들의 얼굴을. 매번 누군가 새 바닥과 기둥을 만든다. 새 벽과 천장을 짓는다. 이야기가 태어난다.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뿐 아니라, 배우가 마침내 그 타인이 되기까지 필요했을 시간까지 전부 더해야 한다. 그러니까 두 시간짜리 공연도 실은 몇십년짜리 시간인 거다.
플랫폼을 지나 기차역을 빠져나온다. 한 세기를 견딘 낡은 기차역에서, 매번 최후의 개체가 되기로 하는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