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세상 읽기]있지만 없는 농어촌 공약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세상 읽기]있지만 없는 농어촌 공약

‘어묵의 계절’이 돌아왔다. 엄동설한에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 때 출마자가 시장에서 어묵꼬치를 먹는 장면은 대선의 상징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 탄핵으로 선거가 모내기철로 바뀌면서 어묵보다 덜 뜨거운 메뉴를 먹지만 시장에서 펼쳐지는 ‘선거 먹방’만큼은 유구하다. 전통시장 방문이 낡았다는 비판도 많지만, 도시가 아닌 농어촌에서 사람 모이는 곳은 터미널과 시장이다.

농촌에서 대선은 ‘전국노래자랑’ 투어 다음으로 큰 구경거리다. 그렇다 해도, 몰린 사람들을 보고 지지자가 구름떼처럼 모였다고 착각하지는 말기를. 오일장이 서는 날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빽빽한 이유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배차시간이 너무 띄엄띄엄이어서다. 그래서, 농촌의 시장은 농촌 실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장소가 아니다. 정말 농촌의 사정을 알고 싶다면 ‘이(里)’ 단위 정류장에 앉아 하염없이 농어촌버스를 기다려보길 강권한다.

12·3 내란 사태로 갑자기 치러지는 대선인지라 공약을 날카롭게 벼릴 성의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물며 공약집 맨 끝자리를 차지하는 농업·농촌·농민 정책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그나마 원내·원외를 떠나 농어촌 공약을 내건 곳은 더불어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정도다. 관련 공약 중 머리말에 해당한 1번 공약만 보자면 민주당은 ‘스마트 데이터 농업 확산’으로 농업을 미래농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필두다. 푸드테크·그린바이오 산업 육성, K푸드 수출 확대, R&D 강화, 농생명용지 조기 개발을 내세웠으나 농어업 정책에 이런 외래어가 끼어들면 희한하게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농촌 현실에 누가 저 세련된 신조어를 받아낼 수 있을지 뚜렷하지 않아서다. 청년들을 불러들이려면 농촌 마을이 살아갈 만한 곳이어야 하건만 지금 그러한가 물어보면 묵묵부답일 터다.

민주노동당은 농어업 먹거리를 기술적 해결책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며 지속 가능한 생태농업으로의 전환을 머리말로 삼았다. 기후위기와 먹거리 현안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제시하고 꼼꼼한 농촌주민 정책도 있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지금의 진보 진영의 답보 상태가 기대를 무너뜨린다. 국민의힘은 딱히 농업정책이라 부를 것도 없다. 필수 농작물 수급 안정 정도를 내걸었지만 이는 ‘생활물가 부담 완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굳이 농업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수급 안정과 물가만 잡으면 된다는 기조는 윤석열 정부가 손쉽게 쓰던 농산물 수입 카드를 꺼내 들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도시 엘리트 지향인 개혁신당은 농어촌이 관심사도 아닐 테지만 일차산업부를 만들어 농수산 업무를 통합하는 정부 조직 개편안을 언급하는 정도다. 농어업을 여전히 1차산업 정도로 여기고 농촌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조차 없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예전만큼 농촌 표가 절실하지 않아서 이렇다. 인구가 적다는 것은 끌어들일 표도 적다는 것으로만 보는 탓이다. 때로는 농업정책 자체가 도시 유권자들의 밥상 근심을 덜기 위한 공약에 가깝기도 하다. 그래서 출마자들이 농촌 시장에서 어묵도 먹고 딱히 용처도 없어 보이는 나물도 몇 두름 사는 일이 농촌을 염두에 둔 일인지 의문이다.

농사지어 먹고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나고, 그렇게 사람이 줄다 보면 약국도 슈퍼마켓도 문을 닫는다. 급기야 학교와 파출소, 보건소마저 문을 닫는다. 농촌에 살고자 귀농·귀촌을 했다가도 학교와 병원이 없는 농촌에서 아이 키우기가 불가능해 다시 떠날 고민을 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아예 마을이 사라질 판이니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뒤얽힌 농촌 ‘뫼비우스의 띠’를 한 번은 잘라내야만 저 예쁘장한 농어업 공약들이 먹힐 것이다. 한 명의 아이라도 있다면 학교 문을 닫지 않겠다는 선언이 나오지 않는 대통령 선거가 모내기철과 함께 왔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