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쿠쇼르 단 부쿠레슈티 시장이 18일(현지시간) 부쿠레슈티에 있는 선거 본부를 나서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에서 유럽연합(EU)에 친화적인 니쿠쇼르 단(55)이 민족주의 극우 성향인 제오르제 시미온(38) 후보를 꺾고 극적으로 승리했다. 이달 초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시미온 후보에게 두 배 가까이 뒤쳐진 끝에 거둔 극적인 역전승으로, 반트럼프 정서와 반러시아 정서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AP·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친유럽 성향의 단 부쿠레슈티 시장은 18일(현지시간) 열린 대선 결선투표에서 개표율 99% 기준으로 54.1%를 얻어 45.9%에 그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제1야당 결속동맹(AUR) 대표인 제오르제 시미온 후보를 8.2% 포인트 차로 제치고 승리했다.
지난 4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시미온 후보는 41%를 득표하며 단 당선자(21%)를 두 배 가까이 앞서며 1위를 차지했다. 극우 시미온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보이자 결선투표 투표율이 치솟았는데, 결선투표 투표율은 64%로 2000년 대선 1차투표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됐다.

니쿠쇼르 단 부큐레슈티 시장이 18일(현지시간) 루마니아 대통령 결선투표 1차 출구조사 후 연설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공산주의 몰락 이후 루마니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선거’로 불린 이번 선거에 온 유럽의 시선이 쏠렸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EU와의 통합을 내세우는 단 당선자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 EU로부터 거리두기를 주장한 시미온 후보가 맞붙었다. 단 당선자는 “서방 지지 루마니아와 서방 반대 루마니아의 대결”로 규정하기도 했다.
수학자 출신으로 부동산 불법 개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단 당선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반부패, 친유럽 노선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EU를 강력히 지지하는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은 점점 커지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루마니아의 안보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해왔다.
극우 성향 민족주의자인 시미온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우며 루마니아의 ‘마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해왔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반대하고 EU 지도부를 비판해왔다. 러시아와의 연계 의혹도 꾸준히 제기됐다.
EU는 시미온 후보가 승리할 경우 루마니아가 헝가리·슬로바키아와 같은 친러 국가들 편에 서면서 러시아에 맞선 동맹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왔다. 루마니아는 나토 공군기지와 미국 탄도미사일방어시스템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
단 당선자의 극적인 역전승은 유럽 내 반트럼프 정서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그룹의 유럽 담당 상무이사 무즈타바 라흐만은 “트럼프가 유럽 선거에 미친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정치 및 정책 방향이 ‘마가’와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우려가 유권자들을 움직였다”고 로이터통신에 논평했다.
중도 우파 ‘루마니아 살리기 연합’ 소속 상원의원 이리네우 다라우는 “마가가 오늘 패배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졌다”며 “어려운 시기에 그렇듯 조용한 다수가 투표에 나섰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전했다.
단 당선자의 승리가 확정되자 부쿠레슈티 시내에 모인 군중은 “러시아, 루마니아는 당신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극우 성향 대통령 후보 제오르제 시미온이 대선 결선투표에서 패배했다. AP연합뉴스
단 당선자의 승리로 EU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러시아 안보 위협에 맞서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EU 지도자들은 일제히 환영의 메시지를 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역사적인 승리”라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루마니아가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거듭된 조작 시도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국민이 민주주의, 법치주의, 그리고 EU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루마니아 국민이 강력한 유럽 안에서 개방된 루마니아의 번영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선거는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지는 등 정치적 격변 속에 치러졌다. 지난해 11월 대선이 치러졌지만 헌법재판소가 선거법 위반과 러시아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명령했다. 당시 1위였던 극우 컬린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시미온 후보가 극우 지지층을 흡수하며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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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선 투표를 앞두고 루마니아 정부는 소셜미디어에 조직적으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움직임이 포착됐다며 “러시아 개입의 특징을 보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한편 텔레그램 창립자 파벨 두로프는 “서유럽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루마니아 보수층 목소리를 침묵시켜 달라고 텔레그램에 요청했다”며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서유럽 정부가 프랑스임을 암시했다.
한편 이날 폴란드에서 치러진 대선 1차 투표, 포르투갈에서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도 친EU 성향의 중도우파가 우세를 보였다. 폴란드 대선 1차 투표에선 친EU 성향 집권 여당 시민플랫폼(PO)의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후보가 30.7%를 득표,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했지만 득표율이 과반에 못 미쳐 내달 결선투표가 치러질 전망이다. 포르투갈 조기 총선에선 중도우파 민주동맹이 의회 230석 중 89석을 확보해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 최소 의석 116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극우 포퓰리즘 정당 셰가가 58석을 확보하며 급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