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고 러·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으나 교착 상태인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 정부가 지난 3월 제안한 ‘30일 휴전안’ 수용을 러시아에 압박하는 대신 휴·종전 협상을 러·우크라이나에 맡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중재역을 자처했던 미국이 사실상 뒤로 한발 물러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과 2시간에 걸친 전화 통화를 마친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대화는 매우 잘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휴전 및 종전 협상에 즉각 착수하기로 했다면서 “(휴전과 종전의) 조건들은 두 나라 사이에서 협상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할, 협상의 구체적 사항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러시아는 이 재앙과 같은 피바다가 끝나면 미국과 대규모 무역을 하길 원하고 있고 나도 동의한다”며 “이는 러시아가 막대한 일자리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이다. 그 잠재력은 무제한이다”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이 러시아와의 교역 재개 및 경제 협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무역의 큰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교황이 대표하는 바티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 개최에 매우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고 소개한 뒤 “(협상을 위한) 절차를 시작하자”고도 했다. 앞서 교황청은 레오 14세 교황이 바티칸을 평화회담 장소로 제안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이 중재 노력에서 빠질 수 있다고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물러설 것이고, 그들은 계속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재 노력을 위한 “어떤 선(레드라인)은 있다”고도 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만나자고 했느냐는 질문에는 “무엇에 관해?”라고 반문한 뒤, 기자가 “우크라이나에 관해”라고 확인하자 “물론 (만나자고) 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소치 시리우스에서 열린 인재 및 성공 재단 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통화를 마친 뒤 취재진과의 문답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매우 의미 있고 아주 솔직한 통화를 했다”면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향후 평화 협정의 윤곽을 그리는 각서를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서에는 합의 시 일정 기간 휴전 가능성을 비롯해 위기 해결 원칙, 평화 협정 체결 일정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푸틴 대통령은 설명했다.
이는 종전 협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서 형태의 합의를 먼저 도출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휴전 등 평화 협상 진전에 관해 낙관적인 시각을 내비친 것과 달리 푸틴 대통령은 협상 재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적절한 합의에 도달하면 휴전할 수 있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직접 회담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게 해줄 이유를 제공한다”고도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특히 “우리의 분명한 입장은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추진 등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한 것이다.
미·러 정상 통화 결과에 대해 외신들은 푸틴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당초 미국은 러·우크라이나에 ‘30일 즉각 휴전’을 제시했고 우크라이나도 이에 동의했으나 러시아는 휴·종전 조건에 대한 협상이 끝나야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정상 간 통화에선 러시아가 평화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 할양 등 요구 사항 일부를 포기했다는 단서도 없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즉각 휴전하지 않으면 제재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으나 이날 통화에선 이런 경고 역시 없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미·러 정상 간 통화 전에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군은 결코 자국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말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청했다.